[환경] ‘촛불’이 우리에게 묻는 것

 

‘촛불’이 우리에게 묻는 것

 

글. 장성익 환경 저술가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다. 지금은 독립적인 전업 저술가로 일한다.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출판 기획,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바야흐로 ‘촛불 혁명’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새 길을 내고 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되도록 이끌어낸 것은 전적으로 촛불의 힘이었다. 하지만 명심할 게 있다. 이런 때일수록 긴장의 끈을 늦추어선 안 된다. 권력자 한 명을 권좌에서 끌어내린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요 정당들을 비롯한 기존 정치 기득권 세력의 기회주의적 이해타산이나 소수 정치 엘리트들의 권력 게임에 눌려 ‘촛불의 길’이 왜곡되거나 변질되어선 안 될 것이다. 나라 안팎의 여러 역사적 경험이 일깨워주듯이, 안이한 마음으로 방심하다간 거세게 불타오른 시민 저항이 결국은 ‘죽 쒀서 개 주는’ 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나라의 주인인 우리 시민 각자가 한결같이 민주공화국의 절대적 주권자이자 입법자로서 소임을 다해야만 비로소 지금 타오르는 촛불은 우리 공동체의 새로운 미래를 환히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에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양한 분석과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핵심은 권력 사유화 문제가 아닐까 싶다. 건설업자 출신인 이명박도 별반 다르지 않았거니와 독재자의 생물학적 딸일 뿐만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 후예’이기도 한 박근혜는 유난스레 권력의 공적 성격에 대해선 아무런 인식이나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에게 권력은 사적 탐욕과 자기만의 기괴한 허영을 채우는 수단일 뿐이다. ‘공적인 가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하긴 정신세계, 인격, 능력과 자질, 사회관계 등 모든 면에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니, 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새삼 떠오르는 것은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한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바보, 멍청이, 백치 등을 뜻하는 ‘이디엇idiot’이라는 영어 단어의 뿌리를 더듬어보자. 이 말의 어원은 ‘이디오테스idiotes’라는 고대 그리스 말이다. ‘공적인 일엔 관심 없이 오로지 사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뜻한다.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이디오테이아idioteia’라는 그리스 말도 비슷하다. 여기엔 ‘어리석음’이라는 뜻과 ‘사적인 삶’이라는 뜻이 동시에 담겨 있다. 요컨대, 옛날 아테네 시민들은 사적인 삶에 빠져 공적인 삶을 망각하거나 도외시하는 이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겼다는 얘기다. 그들은 사적인 삶의 동굴에 드리워진 무지몽매의 어둠에 갇히지 않았다. 사적인 삶을 에워싼 어리석음의 장벽을 넘어 열린 광장에 모였다. 거기서 그들은 공적인 사안을 놓고서 서로 의논하고 토론을 벌였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끈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어느 유명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 아테네에서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시민으로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됩니다.” 

2500년 전, 아테네에서 직접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 이것이다. 공적인 참여와 실천이야말로 아테네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으뜸가는 ‘시민 덕성’이었다. 이렇게 보면 21세기 대한민국과 까마득한 그 옛날 아테네는 사정이 정반대다. 여기서는 공적인 마음가짐과 자질을 가장 투철하게 갖추어야 할 최고 권력자(와 그 주변 패거리)가 거꾸로 사적인 욕심과 관심사에 매몰돼 공적인 대의를 내팽개쳐버렸다. 아테네 시민들의 삶의 문법에 따르면 가장 어리석고 쓸모없고 하찮은 사람(들)인 셈이다. 반면에 공적 가치의 깃발을 펄럭이는 주체는 촛불 시민으로 상징되는 보통 사람들이다. 사적인 일상에서 먹고사느라 바쁜 평범한 생활인들이 외려 가장 위대하고도 숭고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환경-삽화

 

참된 민주공화국이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특정 권력자나 정권 차원을 넘어서는 이 세상의 보다 근본적인 맥락이다. 얘기의 흐름이 훌쩍 비약하는 듯하지만, 이 기고란이 환경 칼럼인 만큼 모든 환경문제의 뿌리인 현대 산업문명을 앞의 논의와 연결 지어 한번 되살펴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을 한마디로 간추리면 ‘사적 욕심’과 ‘이익의 극대화’ 논리를 뼛속 깊이 아로새긴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이 무엇인가? ‘생산하는 일’이다. 재화든 서비스든 뭔가를 많이 생산할수록 좋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굴러가는 게 산업문명이다. 여기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질’이 아니라 화폐 가치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표현되는 ‘양’이다. 과정이나 관계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결과만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이 피눈물 나는 어린이 노예노동으로 생산되었든 말든,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든 말든, 자연을 폐허로 만든 것이든 말든, 그것을 취하는 사람에게 사적인 이윤과 이익을 최대한 많이 안겨주기만 하면 그것이 최고로 여겨진다. 경제성장 지상주의, 물신주의, 탐욕적 이기주의, 파괴적 경쟁주의 같은 것들이 이 세상과 우리 삶을 호령하게 된 것은 그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자연, 생명, 미래세대, 지속가능성 등과 같은 생태적이고 공적 가치들은 무차별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공적인 것’을 업신여기고 ‘사적인 것’을 떠받드는 곳에선 민주주의는 물론 인간과 자연 모두 온전할 턱이 없다. 박근혜 정권이 그러하고 현대 산업문명 또한 그러하다. 

사적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공적 가치를 이루려고 애쓰는 것은 민주공화국 시민의 책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꽃피울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함께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와 생태주의는 이처럼 긴밀하게 한길에서 만난다. 참된 민주세상이라면 마땅히 아름다운 생명평화 공동체일 터이다. 2017년 새해를 우리는 촛불과 함께 열고 있다. 드넓은 공공의 광장에서 넘실거리는 촛불은 이 세상과 우리 삶의 보다 깊은 진로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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