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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03월
  • 2020.03.01
  • 532

그 겨울,  
붕어빵 아저씨는 어디에

 

 

3월호

 

아내와 저녁을 지어 먹은 뒤, 붕어빵으로 입가심하자는 핑계로 눈이 흠뻑 내리는 동네 길에 함께 나섰다. 눈이 이렇게 반가운 걸 보면 유난히 따뜻했던 올겨울이 달갑지만은 않았던 거라고 서로에게 입김을 호호 불어대며 버스정류장 앞에서 봐뒀던 붕어빵 노점을 향해 종종거렸다. 

 

5분을 걸어 도착한 붕어빵 노점엔 갓 구운 여남은 붕어빵들이 열반에 놓여 있을 뿐 주인아저씨가 보이질 않았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놓고 붕어빵을 집어가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몇 개를 집어가야 할지 나도 아내도 막상 알지 못했다. 자리에 따라, 들어간 내용물에 따라 붕어빵 두 개에 천 원 하는 곳도 많지만, 운 좋으면 같은 가격에 일곱 개도 받을 수 있는 게 붕어빵이니까. 열반 위의 붕어빵들을 눈요기만 하면서 속이 비치지 않는 걸 보면 잉어빵이 아니라 붕어빵이 맞네, 안 맞네, 시답잖은 소릴 하고 나서도 주인아저씨는 돌아오질 않았다. 막연한 기다림 사이로 불현듯 13년 전 내가 살던 일산에서의 기억이 스몄다.  

 

붕어빵에 반대하는 이상한 집회

2007년 11월 9일, 주엽역 광장에서 붕어빵 장사에 반대하는 수천 명이 운집했다. 고양지역 120여 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고양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가 주최한 집회의 정확한 이름은 ‘불법 노점상 반대를 위한 걷기대회’였다. “무질서 행위를 근절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고양시를 만들자”는 것이 집회참가자들이 외치는 주장의 골자였다. 세상에 반대할 것이 많기는 하지만 이 휑한 동네에 노점상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떼로 모여 반대까지 하는 걸까.

 

고양시에는 진짜 형편이 어려운 노점상보다는 기업형 노점상인이 많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범대위는 기업형 노점상들이 알바생까지 쓰면서 세금도 내지 않고 장사를 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전국노점상연합(이하 ‘전노련’)이 이권을 갈취하고 있다고 했다. 전노련 같은 극악한 폭력 조직이 고양시의 교통을 마비시키는 걸 좌시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말대로 점심 무렵 그 집회현장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문화초등학교 앞으로 전노련을 필두로 한 행렬이 멈춰 섰다. 학교 앞에서 달고나 좌판을 하던 이근재 씨의 노제 행렬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전 10월 11일, 태영프라자 앞에서 노점상 단속이 있고 난 뒤 다음 날 새벽, 그는 인근 산책로에서 목을 맨 채 발견이 됐고, 이후 분노한 노점상들의 집회와 협상이 이어진 끝에 27일 만에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것이었다. 

 

그는 붕어빵을 굽기 전까지 책걸상을 만드는 목공 일을 하며 1남 1녀를 둔 가정을 꾸려갔다. 그러던 1997년  IMF 직전에 공장이 부도나면서 학교 앞에서 달고나 좌판을 시작했고 그의 아내는 그보다 좀 떨어진 태영프라자 광장에서 붕어빵을 굽고,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같은 자리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이 쌓였다. 

 

이근재

故 이근재 씨 생전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여보 미안해, 당신 고생 시켜 미안해”

2007년 초, 고양시 세 번째 민선시장은 ‘질서 있는 품격 도시 만들기 추진계획’을 내세웠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의 핵심공약이었던 ‘디자인 서울정책’ 중의 하나인 ‘노점상에 대한 관리대책’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고양시만의 독자적인 추진임을 강조했다. 성과가 간절했던 고양시는 ‘품격’을 추구하기 위해 노점 정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예산을 31억까지 늘려 잡았고, 무자격 용역업체를 동원해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 앞 노점 좌판들을 엎었다. 
 

그날 아침도 용역들은 노점상들이 자리를 펴자마자 달려들어 손수레를 엎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단속현장을 둘러싼 용역들에 막힌 이근재 씨는 밖에서 포장마차를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내를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그날 밤 그의 곁에서 아내가 끙끙 앓았다. 뜬 눈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잠이라도 한숨 잤을까? 그는 평소 정발산에서 매일 하던 새벽 운동을 거르고 인력시장에 나섰다. 몸이라도 건강해야 한다며 임진각 마라톤 대회도 나섰던 그였다. 그러나 막 찬바람이 들이치기 시작하는 계절, 그를 위한 일자리는 없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 철도변 길에서 목을 맸다. 남긴 유서 한 장 없었다. 

 

고양시는 단속 현장의 대상자도 아니었고, 유서도 한 장 남기지 않은 개인의 신병비관 자살은 단속과 무관하다며 대화를 거부했다. 한 달이 다 돼가도록 장례가 치러지지 않은 이유였다. 그의 죽음에 전노련을 비롯한 7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총 여덟 차례 집회를 열었고, 11월 8일이 되어서야 겨우 고양시청은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시·노점상·시민단체 협의체를 구성하며, 용역을 투입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근재 씨의 아내는 지난 12년간 남편과 함께 밤낮없이 운영해온 그 자리에서 계속 노점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장례식으로부터 열흘 남짓이 되던 어느 날, 그해 첫눈이 내렸던 것을 기억한다.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도 했던 그해 겨울, 품격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이근재 씨의 생존과 죽음에, 시렸던 속이 좀처럼 데워지질 않았다.  

 

다시 돌아오는 선거의 계절

눈이 인색했던 겨울이 지나고, 다시 카메라 앞에서 노점의 어묵과 붕어빵을 집어 먹는 총선 후보자들을 본다. 그리고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저비용 항공사와 해운업에 긴급자금 수백억을 수혈한다는 소식도 본다. 드문드문 지나는 행인을 지켜보고만 있을, 거리 상인들의 곤경은 겨울을 지나고 있을까. 

 

아내와 나는 붕어빵 아저씨를 결국 만나지 못한 채 자리를 떴지만, 길 건너 매생이 가게 옆에서 잉어빵을 굽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붕어빵 노점과 잉어빵 노점의 거리는 채 몇 미터 되지 않았다. 팔리지 않은 잉어빵이 꽤 쌓여 있어 적당히 식었으리라 여기며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나 웬걸, 할머니가 고이 데워둔 잉어빵 안의 팥소는 혀를 델 만큼 뜨거웠다.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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