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7월 2009-07-01   1094

삶의 길목에서_별 볼 일 많은 삶




별 볼 일 많은 삶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유리처럼 맑은 하늘이란 것을 이곳 필리핀에서 처음 보았다. 우리는 맑은 하늘이란 표현을 언제 쓰나?
그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게 갠 하늘을 보고 그렇게 쓰지 않나 싶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올려다본 이곳의 하늘은
신비로울 정도로 맑았다. 구름이 많이 끼어있었고, 잠시 뒤에는 거대한 구름이 빠른 속도로 흘러다니고 있었는데도
맑았다. 표면이 말간 유리 같았다. 마치 거대하고 투명한 유리 막이 지구별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돌을 세게 던지면 부딪쳐서 금이 갈 것 같았다. 유리처럼 맑은 하늘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처음으로 알았다.
서울에 일 보러 갔다 밤에 여주에 있는 집에 귀가하여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별이 총총했었다.
한겨울엔 별빛이 더 또렷했지만 그렇다고 반짝거릴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별들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로 시작되는 귀에 익은 번안 동요의 노랫말이 참으로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곳에선 달빛이 무척 강렬하다. 창문으로 달빛이 강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어느 날,
창가 침대에서 자던 딸이 갑자기 물었다. “엄마, 달빛에도 살이 탈까?” 더위에 속옷을 배 위까지 걷어 올리고
잠을 청하던 딸에게 달빛이 햇살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졌나보다.
저녁놀이 또한 일품이다. 해질녘 하늘은 옅은 오렌지색, 분홍색, 주황색, 연보라색, 가지색, 군청색, 남색, 납색,
짙은 먹색 등 형형색색으로 분초를 다투며 옷을 갈아입는다. 불타는 황혼을 배경으로 이파리를 시원스럽게 늘어뜨린
키가 훌쩍 큰 야자수 두 그루는 남국에서만 볼 수 있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닌가 싶다. 고색창연한 성당의 둥근 탑과
뾰족탑은 석양에 더욱 성스러운 자태를 뽐낸다. 저물어가는 햇빛과 구름은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서녘 하늘에서
한편의 마술을 빚어내기도 한다. 어느 날 파도 넘실대는 섬과 해변이 하늘가에 보였다. 나는 그쪽에 바다가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튿날 보니 그것은 한 그루의 큰 나무였다. 나무와 노을이 꾸며낸 장난이었을 뿐이다. 어떤 날은
하늘가에 웅장한 산이 자태를 드러내기도 했다. 여행자의 눈을 감쪽같이 속인다는 사막의 신기루도 이런 것일까?
해질 녘의 하늘엔 비행기도 날아가고 일렬 횡대의 새떼도 날아가고 산들바람도 분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주인공
‘어린왕자’도 새떼를 타고 지구별을 찾아와서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를 만났다. 어린왕자의 고향 별은 의자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만큼 멋진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아주 조그만 별이었다. 어린왕자는 슬플 때
노을을 보면 멋지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노을을 44번이나 보았다고 말한다. 나는 어린왕자처럼 슬픔 때문에는
아니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석양이 빚어내는 황홀경에 빠져 시간을 잊고 있다가 저녁식사에 꼴찌로 가기 일쑤다.
대충 두드려 만든 것 같은 털털거리는 낡은 차량, 질 낮은 연료 때문에 이곳의 거리는 매연이 무척 심하다.
잠깐 동안만 거리에 서 있어도 머리가 아파온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깔끔해 보이는 여성 승객들은 대중교통수단인
지프니를 타면 너나 할 것 없이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는다. 그렇지만 자동차 매연을 제외하고는 공장 같은 대규모 대기 오염원이 거의 없는 까닭인지 지표면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대기의 청정함이 느껴진다. 하늘엔 새털구름이나 비늘구름도 가끔 보이지만 무엇보다
풍성한 뭉게구름이 압권이다. 뭉게구름은 땅이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잘 생기는 구름이다. 지표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발달한다. 말 그대로 뭉게뭉게 피어올라 꼭대기는 솜을 쌓아 놓은 것처럼 뭉실뭉실하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동산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온갖 공상을 펼치는 이야기 속의 많은 등장인물들과
달리 메마른 성격의 나는 어린 시절 구름을 타고 날고 싶다거나 하는 꿈을 품어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불혹의 나이에
백일몽을 꾼다. 뭉게구름을 보고 있으면 손을 뻗쳐 한없이 보드랍고 보송보송한 촉감을 느껴보고 싶다.
폭신하고 편안한 구름이불에 드러누워 두둥실 날아올라 한없이 흘러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예년 같으면 한국은 지금 장마이겠다. 이곳도 6월부터 10월까지 우기다. 우기에는 스콜이 자주 내린다.
그렇지만 장마처럼 눅눅하고 지루한 맛은 눈꼽만큼도 없다. 잔뜩 찌푸린 채 낮게 드리운 하늘이나 온종일 내리는 비는 드물다.
스콜은 눈깜짝할 새에 찾아와 좍좍 내려꽂히다가 어느 순간 뚝 그쳐버리는 도깨비 같은 비다. 거무스레한 소나기 구름이
하늘을 덮는가싶다 하면 1초도 지체하지 말고 빨래를 걷으러 쏜살같이 줄달음쳐야 한다. 빨랫줄에 당도하기도 전에 벌써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의 행진곡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홉 살 먹은 작은 딸은 영어 수업 시간에
솜처럼 푹신해보이기만 한 그 구름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비를 품고 있는지 마냥 신기하다고 시를 썼다.
넉 달 넘게 계속되는 우기에는 스콜이 자주 내리지만 우산이나 우비가 없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10여 분 처마 밑에서 비를 긋고 있으면 어김없이 소나기가 그치고 언제 그랬냐싶게 하늘이 개고 해가 쨍하다.
지붕은 있지만 벽은 없는 대중교통수단인 지프니는 비가 오면 비닐 장막을 내린다.
그러나 지프니 지붕 위에 올라앉은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 승객들은 기나 긴 가뭄 끝에 단비라도 오시는 양,
아니면 염원하던 독립을 맞이한 식민지의 백성처럼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환호성을 지르며 거리를 지나간다.
이곳의 천둥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소리를 낸다. 나는 여태 살면서 그렇게 큰 천둥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가없는 하늘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면 이런 소리가 날까. 천둥과 비를 동반하지 않는 마른 번개도 자주 친다.
하늘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되풀이하면서 장관을 연출한다. 대자연이 선사하는
장엄한 레이저 쇼를 보는 기분이다.
TV도, 라디오도, 읽을 거리도 거의 없는 이곳에선 별 볼 일이 많다. 한국에서도 시골에 살아서 삭막한 도시 생활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분주한 일상에 묻혀 살다보면 머리에 광활한 하늘을 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사는 날이
많았다. 생활이 단순해지는 만큼, 문명의 이기에서 멀어지는 만큼 자연이 삶 속으로 들어와 그득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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