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 하나하나가 운동, 그 속에서 행복해야
‘고려대 교수· 조치원읍 신안1리 마을이장’
강수돌 교수는 요즘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교수라는 직분이 주는 선입견과 달리 골목길을 돌 때마다 경적을 울리고, 주민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는 영락없는 시골 이장님이었다. 자신들과 끝까지 함께 할 이웃이라는 믿음이 지금 그를 이 자리에 있게 했음을 단박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고려대학교 서창 캠퍼스에 부임한 뒤 이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오르면 포근한 산자락에 둘러싸인 수수하면서도 비범한 그의 귀틀집이 나온다. 서울 탈출을 꺼리는 세상에서 이렇게 자연 속에 파묻혀 가족들과 소박한 밥상을 나누며 살게 된 데에는 그 나름의 ‘개똥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진보운동이 지금까지는 마지막 그림을 그려 놓고 과정을 무시한 채 그 그림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지에만 노력하는 모습을 주로 보였다면, 이제는 과정 하나하나가 운동이라 생각하고 개인이나 집단 모두 과정 속에서 대안의 싹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해야죠. 결단하고 각오할 때의 장중함도 있어야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운동이 오래 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삶의 과정 속에서 대안적인 싹을 실험해보고 그 과정 속에서 행복해야 합니다.”
시골 마을을 덮친 행정도시 바람
인사 잘하는 강수돌 이장이 세상과 맞서게 된 것은 행정수도 파문과 그에 편승한 투기자본 때문이다. 신안1리는 행정도시가 들어서는 곳에서 차로 20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투기자본이 이를 가만둘 리 없다. 고려대와 홍익대 캠퍼스를 끼고 있어 대학촌을 건설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무산되고 논밭과 과수원이 있던 자리에 1,000여 세대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런데 그 건설 계획이 확정될 때까지의 과정은 탈법과 야합으로 얼룩진 그야말로 요지경 속이었다. 그는 작년 봄부터 비밀리에 진행된 이 건설 계획의 전모를 추적하고 폭로해왔다. 그는 공무원과 전 이장과 건설회사의 유착이 이 사태를 야기했다고 본다.
“원래 연기군에서 이 지역은 4층까지만 지을 수 있는 1종주거지역이었어요. 그런데 행정수도 바람이 불 때 아파트 업체가 도청까지 올라간 그 서류를 철회시켰습니다. 그리고 전 이장이 멋대로 여러 주민의 도장을 찍어 15층까지 지을 수 있는 2종주거지역으로 지정해 달라는 민원서류를 제출해버린 겁니다.”
전 이장이 위조한 문서를 찾아낸 그를 마을 사람들은 2년 임기의 새 이장으로 선출했고, 15명의 주민이 대책위원회를 꾸려 아파트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그는 이곳에 본래 계획대로 대학촌이 건설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는 입지적으로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이 적합하지 않아요. 주민과 학생, 교직원이 어울려 사는 대학문화촌을 만들어야 하는 곳입니다. 저수지 주변으로 호수공원을 만들고, 주변의 자연경관을 살리면서 문화 카페, 갤러리, 공연장도 만들고요. 욕심을 더 내자면 평생교육원을 만드는 것도 좋고요.”
방학 때는 대학을 이용한 영어캠프도 할 수 있고, 교육과 문화 차원에서 이런 대안을 세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답답해한다.
아파트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켜라
그는 지금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파트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투쟁을 펼치고 있다. 군수, 도지사와 면담하고, 가짜 민원서류에 대한 행정소송을 벌이고 있고, 1인 시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정에 차질을 겪게 된 건설회사가 가만있을 리 없지 않은가. 집시법 위반으로 고발당하고,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가압류가 들어오고, 이 때문에 민사소송도 하고 있다. 그 와중인 지난 7월 새로 취임한 도지사가 덜컥 아파트건설 사업승인을 해줬다. 다시 도청 앞에서 시위를 하고 도지사를 만났다. 도지사는 행정소송이 걸려 있으므로 재판을 지켜보겠고 연기군수와 상의하겠다고 말했다. 강 이장과 마을 주민들의 투쟁 의지는 높고 대안은 뚜렷하다.
“사업승인 유효기간 3년 동안 계속 소송과 민원을 제기하면서 저지했습니다. 누가 봐도 여기는 아파트가 들어올 곳이 아니지요. 난개발과 투기의 온상이 될 행정도시가 들어서면 연기군은 ‘쓰레기장’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겁니다.”
그들은 이를 막기 위해 독자적인 발전 계획을 가지고 있다. 복숭아가 맛난 곳이니 친환경복숭아 농사를 짓고, 기존의 대학을 살려 산학연구단지 등과 연계할 수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파트만 지어 투기꾼을 불러서 뭐하겠습니까? 정치자금줄 밖에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이익은 기업이 가져가고 비용과 손해는 사회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큰 문제지요.”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그에게 이 싸움은 자신과 마을 사람들의 삶터를 지키기 위한 절박한 투쟁이자 사회구조적으로는 자본가와의 한판 대결이다.
“건설자본도 자본입니다. 제가 주로 노사관계를 공부하면서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을 주목했는데, 이 모순이 생활전반에서 드러난 것이 바로 이 싸움입니다. 건설자본과 지역민들의 관계는 기만과 은폐와 밀실야합으로 얼룩져 있어요. 이 싸움은 자본의 생산과정이 전 사회적인 과정인 만큼 공장이라는 생산현장을 넘어 생활공간 전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자본가와의 싸움입니다.”
몸으로 배워가는 공동체적 삶
강 교수는 마을 주민들과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며 일체감을 느끼는 행복을 맛보았다. 재판정, 변호사 사무실, 도청을 오가면서, 밥을 먹으면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야기 나누고 같이 고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마을이 양극화될 것이라는 걱정은 마을 사람들이 먼저 했다.
“예전보다는 공동체 의식이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맺어주는 끈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지만 마을이 양분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이대로 같이 가는 것이 좋다는 공동체적 마인드는 참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그가 맛 본 공동체적 삶은 이렇게 사회화된다.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끊임없이 기존 공동체적 마인드와 자본주의의 경쟁적, 개인주의적 성향은 충돌합니다. 우리 내면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적 선택이 늘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적 생각은 곤란하죠. 과정론적인 인식을 갖고 스스로 공동체 형성에 일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연을 닮아가는 아이들
공동체적 삶을 귀히 여기는 강 교수가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풍토에 대단히 비판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가 볼 때, 아이들은 이렇게 커야 한다.
“개인이 가진 개성과 소질, 나름의 색깔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고립화, 원자화, 파편화되지 않고 공동체적 조망 속에서 자기 개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요.”
또한, 부모의 역할은 이렇다.
“부모나 선생님은 아이가 찾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아이 장래에 대해 먼저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되죠.”
큰 아이를 대안학교(간디학교 3학년)에 보낸 강 교수 자신도 은연중에 아이가 자신보다 나은 학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올 여름 수시시험을 치러 가면서 아이는 부모에게 편지를 남겼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재즈음악이라고. 부모의 허락을 받은 아이는 요즘 너무 신이 나있다.
“많은 시간을 들여 힘들게 연습하지만,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가겠다고 해서 인정해주니 자기도 즐거워하고 우리도 마음 편하네요.”
그는 이러한 자신의 교육관이 종종 ‘선택받은 자의 만용’으로 인식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우리 아이들과 사회가 어떤 식으로 가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지금과 같은 사다리 질서 속에서 좀 더 올라가야 행복할 것이라는 시각이 견지되는 한, 끊임없이 우리 사회는 갈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는 아이들이 개성을 살리고 소질을 뿜어낼 때, 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함께 기쁨을 나누는 원탁의 질서를 지향하는 교육을 원한다. 아이들이 자연을 느끼며 더불어 사는 행복감을 느끼길 바란다. 그의 바람대로 산자락을 뛰어다니며 자란 그의 아이들은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
“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다, 분뇨를 거름으로 쓰고 목초액을 받아 농약 대신 쓰면서 채소를 길러 먹는 과정이 아이들의 삶 속에 체험이 되죠. 요즘에는 소박하지만 건강한 음식을 알아가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지렁이와 뱀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집안을 돌아다니는 벌레는 무조건 죽이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요.”
아이들에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은 그의 바람은 벌써 이뤄진 듯하다. 거기다 동네 자랑에 열심인 그를 보면 부러움이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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