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12월 2005-12-01   1277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주민투표 그후

방폐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11월 2일 막을 내렸다. 방폐장 주민투표는 이날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1위에 올라갈 만큼 뜨거운 국민적 관심사였다. 정부에서 19년 동안 풀지 못한 난제라고 과장하면서 방폐장에 대해 국민의 관심을 끈 것도 이유겠지만 주민투표 과정에서 사상 유례 없는 불법과 불공정 시비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주민투표, 처음부터 끝까지 ‘불법’

방폐장 주민투표는 시종일관 불공정하고 불법적으로 진행되었다. 9월 15일 산업자원부의 주민투표 실시 요구가 있기 이전부터 지방자치단체들이 유치 찬성 단체에 예산을 지원하고,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유치 찬성 운동을 주도하는 등 투표의 공정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공무원들과 통·반·이장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부재자신고를 직접 받는 과정에서도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불법행위가 저질러졌다. 부재자 신고 비율만으로도 투표의 공정성과 적법성을 의심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각 지역의 유권자 중 부재자 비율을 보면 군산이 39.36%, 경주가 38.13%, 영덕이 27.46%, 포항이 21.97%에 이르렀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진행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부재자 비율은 1.6%에 불과했다. 10월 20일 중앙선관위는 부재자신고용지를 검토한 결과 죽은 사람이 부재자로 되어있는 등 불법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했고 영덕에서 부재자 신고자를 대상으로 전화조사를 한 결과 7.4%만이 자기 의사로 직접 신고를 했음이 밝혀졌다.

10월 8일 부재자 신고 결과가 나온 직후 중앙선관위와 경찰청이 공무원의 불법 주민투표 운동을 강력히 단속하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현장은 여전히 무법천지였다. 군산과 경주, 영덕에선 시장과 공무원이 앞장서서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영덕에선 공무원들이 ‘사랑방 좌담회’를 열어 유치 홍보를 하고 향응을 제공했다. 또한 공무원과 통·반장이 부재자 투표 용지를 나눠주고 거둬들이면서 대리 투표, 공개 투표 같은 상상하기 힘든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이번 주민투표가 불공정과 불법으로 얼룩진 근본 원인은 부지 안전성은 뒷전인 채 주민수용성 위주로 핵폐기장 부지를 선정하려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서 비롯됐다. 주민투표를 주민 의견 청취가 아니라 국가 정책 결정 절차로 변질시켰고, 유치경쟁을 부추기기 위해 핵폐기장 유치를 ‘3,000억 원+α’가 걸린 이권사업으로 포장했다. ‘이권사업’을 따내려는 지자체는 일찌감치 중립에서 벗어나 불법과 탈법을 공공연히 저질렀다. 청와대와 중앙정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사태를 방치했다. 입만 열면 분권과 자치를 강조해 온 참여정부는 방폐장 투표로 인해 오히려 참여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시민사회, 관권 개입 없는 주민투표법 개정 요구

이번 주민투표는 지자체간 과열 경쟁과 공무원들의 공공연한 주민 동원 탓에 보궐선거나 다른 주민투표에 비해 월등히 높은 투표율과 찬성률을 기록했다. 비록 높은 투표율과 찬성률로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환경단체와 지역대책위는 시시비비는 반드시 가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먼저 주민 투표 과정에서 제기된 고소·고발 사건이 투명하고 엄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금품과 향응 제공, 흑색선전과 지역감정 선동, 대리 투표와 공개 투표 등 불법 행위를 묵과한다면 참여민주주의의 정착은 요원해질 것이다. 하지만 방폐장 주민투표 결과에 대한 무효 확인 소송을 추진하려던 반핵국민행동의 계획은 사실상 크게 후퇴했다. 주민 투표에 대한 무효 확인 소송이 법률적 근거가 미약할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높은 투표율과 89.5%라는 경주지역의 압도적인 찬성률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법과 불공정이 상당부분 인정된다 해도 주민 투표 결과를 뒤집기에는 찬성률이 놀랄 만큼 높았다. 경주 지역 대책위는 주민투표 결과 무효 확인 소송을 내기 위한 주민 청원 서명을 받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탈락지역도 지원하겠다는 예방책이 효력을 발휘한 탓인지 청와대와 정부가 우려했던 지자체의 불복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산, 포항, 영덕 등 탈락지역에선 방폐장유치위원회가 방폐장 유치를 반대한 주민이나 대책위를 맹렬히 비난하고 따돌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화풀이성 폭력사건도 끊이지 않는 등 지역사회 분열이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영덕 방폐장 유치위원회가 방폐장 주민투표와 관련해 헌법소원을 내 관심을 끌고 있다. 영덕은 총 유권자 대비 찬성 득표율은 1위였으나 “현행 주민투표법이 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 1이상 투표와 유효 투표 중 찬성률 최고지역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민주성과 책임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울산에서도 방폐장 예정부지의 영향권에 들어있지만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헌법 소원을 낼 예정이다.

다른 한편에선 주민 투표 제도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국가사무에 대해 ‘자문적 주민투표’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중앙행정기관에 주민투표실시요구권을 부여해선 안 된다”며 주민투표법 제8조의 삭제를 요구하였다. 실제로 독일 등에서는 지방자치단체장이 국가기관의 압력이나 유도에 의해 국가적 사안에 관한 발의권 행사에 제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주민과 지방의회에만 발의권을 부여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이와 더불어 부재자 신고요건 강화, 지자체 정보제공 의무 삭제, 주민투표공영제의 도입, 투표운동 금지대상자 구체화 등 관권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보완조치도 한 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다.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가 더 어려운 문제

더 큰 문제는 고준위 핵폐기물이다. 핵폐기물 방사능의 99%가 고준위 핵폐기물에 들어있다. 여기에 들어있는 일부 방사능 핵종은 분해되기까지 매우 오랜 시일이 걸려, 독일에선 고준위 핵폐기물은 100만 년 동안 격리한다는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수십 년 간 열과 방사능을 낮춘 뒤 지하 깊숙한 안정된 지층에 유리로 고형화해서 영구 처분하는 방법이 합의되고 일부 국가에서 부지를 정했을 뿐, 고준위 방폐장을 만든 나라가 없는 것은 이런 어려움 때문이다. 중·저준위 핵폐기물은 창고가 가득 차더라도 발전소 부지 안에 임시저장고를 증축하여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지만 중·저준위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고준위 핵폐기물은 임시 저장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 증축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다른 나라들은 20~30년 장기계획으로 치밀한 검토와 연구를 하고 주민을 설득하는 과정을 추진 하고 있다.

2016년 고준위 핵폐기물 포화설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아직까지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어 또 다시 졸속·파행 추진이 우려되고 있다. 때문에 ‘방폐장 문제는 이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라도 정부는 방사성 폐기물 관리법을 제정하고 독립된 방사성 폐기물 위원회를 설립한 뒤 사회적 합의를 거쳐 방사성 폐기물 관리와 처분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상훈 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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