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12월 2005-12-01   858

국보 1호 남대문

최근 감사원의 권고와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발언으로 국보 제 1호를 훈민정음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감사원은 “지금의 국보 체계가 일제 잔재를 반영하고 있다”는 입장이고,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지금의 숭례문이 국보 1호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갖고 있지 않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일제 잔재 청산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 일부 국수주의자들의 “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잔재”라는 터무니없는 선동에 많은 시민들이 현혹되면서 논란이 정치적 쟁점으로 변질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식민사학자 구로이타 가쓰미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을 제정했다. 구로이타는 독일의 유적보존방식을 본받아 대장법(臺帳法)을 조선에서 먼저 시험적으로 실시했다. 당시 고적급유물등록대장의 등록번호 제 1호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이었다. 1919년에는 일본 본토에서 국가 차원의 최초의 문화재보호법이라 할 수 있는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1929년에는 ‘국보보존법’이 제정되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1932년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관제’가 제정되었고, 1933년 8월 9일에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 법령에 따라 8월 27일에 153점의 보물이 지정되었는데, 당시 보물 1호는 남대문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중요한 문화재는 국보로 지정되었고, 식민지 조선의 중요한 문화재는 일본과 차별을 두기 위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도 10년이 지난 후 대한민국도 국보를 가지게 되었다. 1955년 6월 28일, 문교부장관에 의하여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가 정식 발족되면서 기존에 지정된 문화재를 모두 국보로 승격시켰다. 이때부터 국보 1호가 남대문(숭례문)이 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6년 4월 29일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과 시행규칙 및 시행수속을 발표했다. 1948년 11월 1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결정 제5호로 ‘조선물질문화 유물조사 보존위원회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했다. 북한은 국보 1호를 평양성의 동문인 대동문을 지정했다가 몇 년 전에 평양성으로 바꾸었다.

남한과 북한은 모두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서 필요한 것을 뽑아서 법률을 제정했다. 그리고 국보를 비롯한 문화재 지정번호도 일제가 지정한 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잔재라기보다는 1945년 이후 뒤늦게 국민국가를 형성하면서 근대 이후 서양에서 새롭게 나타난 ‘문화재, 문화유물,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을 수용한 것이다. 또한 문화재 지정 번호도 문화재의 가치를 순위로 매긴 것이 아니라 단순한 관리번호일 뿐이라는 근대 유럽의 유적보존방식을 따른 것이다.

오히려 국보 1호를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팔만대장경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제 식민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제식민지시대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세계 최고(最古) 세계 최초(最初) 세계 최고(最高)라는 3최증과 모든 것에 서열을 매기려는 1등주의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박상표 참여연대 회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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