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12월 2005-12-01   488

겨울 채비

수은주가 영하로 곤두박질치던 날 아침, 뽕나무 낙엽 지는 광경을 보았다. 한파의 급습을 눈치챈 나무는 남은 이파리들을 서둘러 떨궈내고 있었다. 어른 손바닥보다 큰 이파리들이 하늘에서 뚝 뚝 떨어져 내려왔다. 노르스름했지만 낙엽이라고 부르기엔 아까울 만큼 한창인 이파리들이었다. 가벼운 바람에도 쉬이 팔랑거리는 다른 종류의 낙엽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중량감이랄까,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무의 시체들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이마에 손차양을 하고 서서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추수와 축제의 계절이 숨가쁘게 지나가면 시골은 곧바로 겨울 채비에 들어간다. 황금빛으로 물결치던 논에는 그루터기만 남았다. 울긋불긋한 허수아비 대신 허름한 볏짚단만 지키고 서 있다. 텃밭은 비었다. 입동 즈음 무도 남김없이 캤다. 김장에 쓸 것을 남기고, 굵직굵직하게 썰어 널었다. 초가을의 따끈따끈하던 기운은 식었지만 아직은 따순 볕을 쪼이고 쌩한 바람을 맞으며 무채는 서서히 말라간다. 서슬 파랗던 무청도 시들시들한 시래기가 되었다. 한해 농사가 끝났다고 거두기만 할까. 땅 속에서 짓는 겨울농사가 또 있다. 새 봄을 바라고 마늘과 양파, 시금치를 간다.

밭 정리가 되었으면 땔감도 쟁여놓아야 한다. 부지런한 집 처마 밑에는 통통한 장작개비가 차곡차곡 쌓여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화목보일러, 무쇠난로, 벽난로에 땔 나무를 구하느라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요즘이다. 건축현장에서 나오는 보잘 것 없는 폐목까지도 임자가 벌써 다 정해져 있다.

월동준비의 고갱이는 김장이다. 김장을 해야 주부들에겐 비로소 한해 일이 끝난다. 날씨가 추워도 상관없는 도시에선 12월 들어서야 김장을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11월 중순이면 끝난다. 그 때가 지나면 배추가 얼기 때문이다. 요즘 시골도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를 갖추게 되면서 김장철이 시나브로 앞당겨지고 있다. 김치 시어질 걱정 없으니 날 추워지기 전에 빨리 해치우자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아무리 김치냉장고가 좋아도 김칫독 한 두 개는 땅속 깊이 묻는다. 묻어놓았던 김치는 이듬해 봄을 넘겨서야 꺼내 김치냉장고로 옮기면 묵은 김치의 별미를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중국산 김치 파동으로 온 나라 사람들이 당장 내일부터 집에서 김치를 담가먹을 것처럼 들썩들썩하던 때, 배추 값도 다락같이 뛰어올랐다. 텃밭에서 하루가 다르게 속이 차 오르는 배추들을 볼 때마다 오지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김장철이 다가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배추 값이 폭락했다. 도시 사람들이야 김장 걱정 덜어 좋겠지만 촌사람 눈에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구조이기에 쌀을 비롯하여 농산물 제값 받기가 이토록 어려운가 하는 생각부터 든다. 배추를 한 번이라도 제 손으로 길러본 사람이라면 배추 한 통이 어떻게 껌 한 통 값밖에 안 될 수 있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도시에서도 낙엽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만 단독주택에 산다면 모를까, 아파트 생활에 월동 준비란 별다른 것이 없었다. 난방은 관리사무소에서 알아서 해줄 것이고, 김치는 얻어다 먹거나 사 먹으면 되니까. 그렇지만 시골의 한해살이는 철저하게 자연의 흐름을 좇는다. 봄에는 심고, 여름에는 가꾸고,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쉰다. 그 철에 나는 것을 먹고, 철에 맞게 일 하며 산다. 그렇게 또 한해 철 들었다.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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