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9월 2003-09-01   830

북한강을 따라서

어느새 9월입니다. 한낮의 햇볕은 여전히 따갑지만 그늘에 서면 제법 선선함이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연일 사건들을 쫓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연구실에 편히 앉아 있는 게 다소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학교도 이제 긴 여름방학에서 깨어나 개강 준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올해도 네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니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욱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간의 속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물리적 시간이야 변함이 없지만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적 시간 내지 삶의 시간은 더욱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 속도에 삶이 치여 우리가 시간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것들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을 제대로 가늠해 보지 못한 채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문득 스쳐 지나갑니다.

빠름과 느림, 그 공존의 균형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길을 나섭니다.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처럼 언젠가 한번 함께 떠나고 싶었던 길을 혼자 갑니다. 강북강변대로에 올라 한남대교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한강을 바라봅니다. 그게 벌써 몇 해전이던가요. 한밤 갑자기 의기투합해 강 건너편 여의도 둔치에 찾아와 더위를 식히던 것이 떠오릅니다. 삼국시대에는 이 강을 아리수라고 했다며 잘난 척하던 사람이 저였던가요. 삶의 모험이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킨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사람은 K 기자였던가요. 방송국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면서 쓸쓸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것이 벌써 몇 해 전의 일입니다. 그날 밤 돌아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시의 한 구절을 찾았습니다.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최승자, 「20년 후에, 芝에게」). 그랬습니다. 언제나 아침에는 새로운 태양이 뜬다며 학교로, 회사로, 세상으로 출근해 왔습니다.

어느새 뚝섬을 지나고 아차산을 지나 양수리로 나아갑니다. 사라져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매미 울음소리가 오늘 따라 우렁찹니다. 길가에는 어느새 철 이른 코스모스가 피어 있습니다. 다산 선생 생가를 옆에 두고 팔당호를 가로질러 갑니다. 양평 읍내에 잠시 차를 세웁니다.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고구마순, 비듬나물, 햇감자조림, 오이냉국, 열무김치 같은 여름 반찬들이 제법 푸짐하고 주인 아저씨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오히려 정겹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문간에서 어슬렁거리고 주인 아저씨 역시 파리채를 든 채 식당 안을 오가는 한가로운 풍경, 아마도 K 기자가 봤다면 저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의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또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다시 한번 삶의 속도를 생각합니다. 너무도 빨리 달려가는 우리들은 바로 그 길옆에 놓여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은 아닌지요. 갈수록 속도를 더해가는 모더니티의 시간 속에서 무엇이 의미 있고 무엇이 의미 없는가는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한 채 삶의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어디론가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그렇다고 ‘느림의 철학’만으로 살아 갈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삶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생활이며, 그 생활 안에는 많은 시간들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빠름과 느림,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가 함께 하는 공존의 균형에 대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강을 이뤄 함께 흘러가야

양평에서 길을 꺾어 유명산으로 향합니다. 유명산을 지나고 모곡으로 가는 길과 청평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청평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북한강을 옆에 끼고 청평 유원지가 길게 이어집니다. 한때 유원지의 대명사였던 이곳도 이제는 적잖이 모던해졌습니다. 하지만 공간이 모던해졌다고 해서 그 안의 사람 또한 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K 기자, 언젠가 한번 이야기했던 야끼도리요코죠를 기억하는지요. 지난 3월 동경에 갔을 때 신주쿠에 있는 선술집 골목인 야끼도리요코죠를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길게 늘어진 골목 안에는 꼬치 냄새, 어묵 냄새, 간장 냄새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른 봄 밤 야끼도리요코죠의 출렁이는 불빛 속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바로 동아시아 모더니티의 내면 풍경입니다. 타자로서의 서구 모더니티에 맞서는, 그 폭력적인 시간의 속도에 맞서서 느리게 흐르는 동아시아 모더니티 시간의 내면 풍경입니다. 그것은 단지 휴식에 대한 갈망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자 공존에 대한 열망입니다.

청평댐을 건너 반대편 길로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비구비 돌아 언덕 마루에 올라섭니다.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수 지점이 바로 눈앞에 펼쳐집니다.

백두대간의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한 두 강물은 바로 여기서 합류해 유장하게 흘러갑니다. 강물 위에는 늦여름 오후의 햇살이 반짝이고 건너편 홍천강 쪽에서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그 시의 한 구절이 다시 떠오릅니다.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인지요.

그럴 것입니다. 마침내 일어서서 모험과도 같은 길을 혼자 떠나는 게 삶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한여름 한갓진 풍경 속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기쿠지로의 여름> 속의 바로 그 두 사람처럼 더불어 동행을 이뤄 걸어가는 게 진정한 삶일 것입니다. 스스로 강을 이루되 함께 흘러가는 삶, 차이와 공존을 동시에 소중히 생각하는 삶이 바로 우리가 꿈꿔 온 진정한 삶이 아닐런지요. 옆에 있었더라면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냐고 또 한번 너스레를 떨었을 K 기자,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요. 사는 게 다소 고되고 외롭더라도 부디 기운내길 바랍니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전격 다시 한번 여의도 둔치에서 만나 시원한 강바람이나 함께 쐬지요. 내내 건강하길 바랍니다. 그럼 다시 소식드리지요.

김호기 본지 편집위원장·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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