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9월 2003-09-01   1159

헌책으로 추억 찾기

인문과학전문 헌책방 오픈


읽지 않는 책을 집에 쌓아두는 것은 욕심이라며, 혹은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책들이라며 자신있게 고물상에 넘겼던 책들. 그렇지만 살다보면 그렇게 버린 책들을 다시 꺼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헌책방에 가보자. 어제 버린 책들이 보물로 변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헌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희소식 하나. 인문과학서점으로 유명했던 ‘오늘의 책’이 헌책방으로 되돌아왔다. 편집자 주

헌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1984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신촌을 지키던 인문과학전문 서점 <오늘의 책>을 기억하는가? 당시 <오늘의 책>에서 근무하던 직원과 그곳을 드나들던 손님이 의기투합해 서울 서대문에 9월 초 인문사회과학전문 헌책방 <어제의 책>을 연다.

지금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는 대학가 앞 사회과학전문 서점들. 젊은이들이 그곳을 찾는 이유는 시중에서 구입하기 어려운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과학서점에는 마음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른바 ‘찌라시’라고 불리던 불법 유인물(?)들도 만날 수 있었다. 민중가요를 들으면서 손님들은 서점 귀퉁이에 마련된 의자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고, 대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술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함께 소식지를 만들던 기억, 서점이 어려워질 때면 모두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던 일들… 이제 추억이 됐다.

<오늘의 책>이 <어제의 책>이 된 이유

김태훈씨(36세)와 류한승씨(31세)는 민주노동당 은평지구당 당원으로 만났다. 이 두 사람의 공통된 취미는 헌책방 순례였다. 마침 헌책방, 책 대여점, 고시원 등을 경영하다 쉬고 있던 김태훈 씨와 경실련 간사로 일하다 퇴직한 류한승 씨는 때를 만난 듯 매일 같이 함께 헌책방을 찾았다. 그러다 이들은 두 달 전 자신들도 헌책방을 열기로 마음먹게 된다. 헌책방에서도 찬밥 취급을 받고 있는 인문과학 책들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서점 이름은 <어제의 책>으로 결정했다. 김태훈 씨는 <어제의 책>이 헌책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류한승 씨는 <오늘의 책>에 대한 오마주라고 표현했다. 둘 다 대학시절 <오늘의 책>에 손님으로 드나들거나 직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서점 이름에 대한 애착이 크다.

8월 중순 문을 열 예정인 <어제의 책>을 찾았다. 1만 5000여 권의 책이 쌓여있었다. 4000여 장의 LP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지가 쌓여있는 책을 걸레로 한 권씩 닦으며 가격표를 붙이고 있던 두 남자의 수다가 그칠 줄 몰랐다.

“여기 『변증법적 유물론』이 있네요. 대학 때 이 책으로 세미나 했었는데, 참 끔찍한 기억이 많죠?”

“서태지가 직접 사인한 서태지 1집 LP가 있는데 이 귀한 걸 왜 버렸을까요? 혹시 공부 안 한다고 엄마가 버린 거 아닐까요? 하하하.”

“이 책은 기증 받았는데 책 주인이 이 책으로 학점을 매우 잘 받았다고 팔릴 때 운수 좋은 책이란 걸 꼭 강조해 달라고 했어요.”

“소련이 망하기 전에 나왔던 책들이 헌책방에 많이 나와있어요. 아마도 사람들이 홧김에 다들 버린 것 아닐까요?”

책마다 사연이 많다. 김태훈 씨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책들을 많이 구했다며 책들에 대한 이런 저런 자랑을 늘어놓았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란다. 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책 사이에 끼인 종이나 물건들을 가려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300원짜리 지하철 승차권도 나왔고 이력서가 통째로 끼워져 있는 경우도 있었고 한다. 다른 헌책방과 다르게 <오늘의 책>은 책마다 일일이 가격표를 붙이고 있었다.

“책을 골라 계산대 앞에까지 갔다가 자기가 예상했던 가격과 달라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죠.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가격표를 붙이면서 책과 친해지고 싶었어요. 헌책방 와서 ‘무슨무슨 책 있어요?’ 하고 물으면 반칙이라는 농담도 있지만 일단 주인이 파악하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가격표를 붙이면서 책의 가치에 대해서도 둘이 이야기를 나눠요. 헌책은 정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은 절판되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불리는 책들이 있으니까요. 그런 책은 비싸게 팔아야죠.”

인터넷이 활성화되면 종이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했고 책을 멀리할 것이라는 예상도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도 사람이 만든 게 분명한가 보다. 종이 소비량은 오히려 늘어났고 서점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렇다면 헌책은? 헌책방의 미래에 이들은 낙관적이다.

“헌책방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헌책방의 미래는 그렇게 암울하지 않다고 봐요. 아직 서울에만 100여 개의 크고 작은 헌책방이 운영되고 있고 인천에는 헌책방 거리가 있을 정도죠. 전에는 돈이 없어서 헌책을 사야 하거나 절판된 책들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문화활동입니다. 헌책방도 세대교체가 되고 있어요. 또 새 책방이 잘 돼야 헌책방도 잘 됩니다. 결국 헌책방은 집에 있는 책들이 밖으로 나와야 하거든요. 사람들이 책을 많이 사면 그만큼 처분하는 책이 늘고, 그래야 헌책방도 잘 되죠. 인터넷을 통해 모인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구석구석 숨어있는 헌책방들을 찾아온답니다.”

영업시간은 오전 정오부터 밤 9시까지로 잡았다. 손님이랑 술 한잔하고 집에 가려면 밤 9시에 문을 닫는 게 가장 적당하단다. 참, <오늘의 책>의 또 한 가지 자랑은 LP다. <세월이 가면>을 불렀던 가수 최호섭이 1977년에 불렀던 <로봇 태권V>, <분홍립스틱>의 강애리자가 부른 <마징가Z>와 같은 동요부터 민중가요는 물론이고 흘러간 가요와 팝송까지 귀한 앨범들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헌책방 등장

헌책방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서울 안국동 지점 <아름다운 가게>는 지난 4월 헌책방을 추가로 오픈했다. 100% 기증으로 운영되는 이 가게는 입소문이 나면서 하루 300여 권 이상의 책이 팔린다고 한다.

헌책방 운영도 자원봉사자들이 한다. 일주일에 나흘 정도 자원봉사를 한다는 윤옥균(60세) 할아버지는 “퇴직하고 나서는 건강이 나빠져 줄곧 집에만 있었는데 5개월 전부터 자원봉사를 하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건강도 좋아졌지만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것도 즐겁고 책을 고르는 사람들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네요”라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긍심을 표했다.

인터넷으로 헌책방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면 최종규 씨가 만든 우리말과 헌책방이야기 나눔터(http://hbooks.cyworld.com)가 가장 훌륭하다. 최종규 씨는 매달 헌책방에 대한 소식지도 발간하고 있다.

헌책을 사러 반드시 서점에 갈 필요는 없다. 책의 품질도 상·중·하로 표시되어 있어 책을 고를 때 정보가 된다.

인터넷 헌책방 hunchak (hunchak.co.kr), yes헌책방 (eoldbook.com), 훈민정음 (hunmin.co.kr), 헌책사랑 (usedbooklove.com) 등도 나와 헌책방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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