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9월 2003-09-01   1277

변정수와 이노형범이 영화 “바람난 가족”의 병한을 말하다

“너나 똑바로 살아!”


요즘 영화 속 여성들이 화제다. 온 가족이 바람을 피운다는 줄거리의 도발적인 영화 <바람난 가족>은 현실세계에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40대의 두 남자가 만나 영화 속 여자들의 인생에 대해 논했다. 편집자 주

영화 <바람난 가족>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병든 남편을 두고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 난 병한(윤여정 분)과 옆집 고등학생과 연애를 시작한 호정(문소리 분), 미혼녀와 바람이 난 인권변호사 영작(황정민 분)이 주인공들이다. 그렇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이 영화는 단순한 불륜영화가 아니었다. 미디어평론가 변정수 씨(40세)와 딸사랑아버지모임 회원 이노형범 씨(43세)가 만나 영화 속의 여성들, 특히 60세에 초등학교 동창과 사랑에 빠진 병한에 주목했다.

이노형범(이하 이노) : 먼저 영화를 보며 느낀 점부터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이 영화는 한국 지식인들의 모순을 통렬히 비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제가 됐던 문소리와 고등학생의 바람에 대해서는 여성의 자발성보다는 거꾸로 아이의 성욕을 채워주는 것에 그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을 마치 자발적 자율인 양 우리 사회가 호들갑 떤 것은 아닐까? 병한의 배우자가 병들어 있는데 바람을 피운 것은 관객에게 비도덕적으로 비치지는 않았을런지. 자기 남편이 죽은 날 며느리와 아들에게 “나 요즘 오르가즘도 느껴. 결혼할 지도 몰라. 인생 솔직하게 살아야겠더라”고 선포한 장면은 신선했다.

변정수(이하 변) : 영화와 반대로 병한이 병들어 있는 데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똑같이 비난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것 또한 결국 ‘남성의 도덕’일 뿐이다. 그 도덕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영화를 보며 우리 엄마도 저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화면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들을 부부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타인인데 법적으로 이혼을 했냐, 안 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실혼을 인정한다면 사실이혼도 인정하지 못할 것 없다. 남편(김인문 분)도 자기가 버려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없는데 가해자를 지목하는 셈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내가 그동안 당한 게 얼만데 내가 내 인생 찾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당연하다. 그나마 병한은 함께 살아오며 생긴 일종의 ‘우정’같은 감정으로 병문안은 가지 않았나. 그걸로 충분하다.

이노 : 이 영화에서 주목할 사람은 배우 성지루가 맡은 역할이다. 그 캐릭터가 우리에게는 가장 큰 울림을 준다. 변호사가 옆에 애인을 태우고 교통사고를 낸 후 경찰에게 돈까지 건넨다. 성지루는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운전했던 이유로 모든 걸 뒤집어쓰게 되는 데 이를 깨닫게 된 성지루가 마지막에 영작의 아들을 죽인 것은 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복수였다. 감독은 그걸 돌려 표현하지 않고 직접 보여줬다. 성지루와 그의 가족이 보여주는 모습. 지식인들의 모습. 이 두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한다.

병한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변 : 성지루가 나오는 장면은 이 영화의 비정함과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고등학생(봉태규 분)의 역할도 주목해야 한다. 여성과 청소년은 우리 사회의 소외된 계층이다. 호정과 그 고등학생은 앞뒤 가릴 것 없이 하룻밤의 섹스를 위해 만난 게 아니다. 서로에게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나름대로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호정이 그에게 “까불지마”라고 하면서도 “귀엽네”라며 매력을 표현하는 모습은, 그녀가 그의 고통은 물론이고 해방의 잠재력까지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호정이 고등학생에게 농락당했다고 볼 수도 있고 반대로 호정이 고등학생을 가지고 놀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노 : 성지루가 영작과 호정의 아이를 죽인 후 성지루의 아내로 보이는 역할(아내인지 어머니인지 영화 속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은 영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 사실 자신의 남편을 죽음으로 몬 사람은 바로 영작인데도 말이다. 아마 병한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남편이 사고 칠 때마다 자신이 세상에 무릎을 꿇어가며 수습하고 살았을 것이다.

변 : 나는 병한이 과연 현실가능한 설정인지 의문이 든다. 그런 삶을 모두 겪은 후 아들, 손자, 며느리 다 있는 가운데 초등학교 동창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일평생 처음으로 오르가즘까지 느끼게 하는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이노 : 중학교 1학년인 딸과 신당동에 떡볶이를 몇 번 먹으러 갔었다. 어느 날 주인 아줌마가 우리에게 와서 묻더라. “두 분은 어떤 사이예요?”하고. 우리를 원조교제 하는 중학생과 아저씨 사이로 본 것이다. 이게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아마 젊은 여성들은 이 영화를 보며 속이 시원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며 실제 시어머니 세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은, 젊었을 때는 시어머니에게 당하고, 현재에는 며느리에게 당하는 이들이다.

변 : 사회 전반적으로 노년여성이 느끼는 자기 몸에 대한 억압,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성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우리 어머니 세대들이 안타깝다. 여성이 독립하기 위한 필수는 경제적 능력이다. 호정이나 병한은 경제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세대에게 두 여자는 환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이노 :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만나면 여성이든 소수자든 모두 해방된 것 같은데 사실 그게 아닐 때가 많다. 호주제폐지문제도 그렇고 혼인빙자간음죄 폐지 논쟁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법감정은 아직 많이 닫혀 있다.

변 : 10대들의 성을 주제로 다뤘던 임상수 감독의 영화 <눈물>이 10대 관람불가였던 것을 기억하는가. 노년의 성을 긍정적으로 잘 표현했던 영화 <죽어도 좋아>도 정작 할머니들이 보면 민망해 하면서 외면하는 분이 더 많았을 것이다. 진일보하긴 했지만 노년여성들이 보다 큰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사회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노 : 한국사회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남자들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남자들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 속도가 차이가 나면서 남녀는 계속 충돌한다. 아울러 남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변 : 아마도 남자들은 <바람난 가족>에서 병한이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말할 때 그 초등학교 동창에게 “너는 그 할망구 보면서 하고 싶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화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은 그 초등학교 동창생이다.(웃음).

이노 :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얼마나 멀었는지를 보여준다. 가정폭력 장면도 비현실적이었다. 과음한 영작이 호정에게 폭력을 휘두르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쩔쩔매자 영작은 “다쳤니?”라고 말한다(웃음). “다쳤니?”라니. 가정폭력 현장에서 그런 일은 없다. 이런 상황이 되면 엄살을 부린다고 더 때린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런 상황에서 저항하지 못했냐, 신고하지 못했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 권력이 없는 사람은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변 : 완벽한 해방구는 없다. 호정의 대사 “너나 똑바로 살아”가 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바람이니 불륜이니 어설프게 도덕적으로 따지지 말고 똑바로 살라는 것. 그건 가부장제에 찌든 한국 남성들에게 하는 말이다.

이노 : 우리가 이렇게 지탱하는 것은 병한 세대 덕분이다. 그들이 가져야 할 것들을 우리가 뺏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조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 더 매진해서 우리 어머니들이 자유로운 여성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변 : 과연 우리 또래의 여성들은 20∼30년 후 어떻게 살아갈까. 그 나이가 되어서야 오르가즘을 느꼈다, 그렇게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젊었을 때부터 탈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젊어서부터 호정처럼 살았으면 병한의 선택을 이렇게까지 쇼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싱글즈>에 열광했던 여성들은 영화 <바람난 가족>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영화 <죽어도 좋아>를 관람했던 중년여성들은 영화 <바람난 가족>의 병한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두 남자는 병한의 선택을 늦었지만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지지의사를 밝혔다.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병한의 삶을 상상하며 그들은 가슴아파했다.

알코올중독인 남편을 두고 아들을 변호사로 만들기까지 병한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여느 어머니들과 다름없이 15년 동안 섹스를 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아들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으리라. 아들과 며느리 손자까지 생긴 상황에서 병한은 더 이상 남편에게 기대지 않는다. 곧 죽을 지도 모르는 남편에게 담배를 던지며 “빨리 피고 죽어버려”라고 독설을 쏟아낸다.

이 영화에는 두 번의 인상깊은 포옹장면이 나온다. 호정과 영작의 애인은 영작이 위기에 처할 때 꼭 안아주며 그를 보듬어준다. 영작은 처음엔 포옹을 거부하지만, 결국 두 여자 품에 안겨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만다. 두 남자는,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던 영작의 아버지도 영작과 같은 기대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초라하게 변한 가부장제에 대한 안쓰러움의 표현이다. 그러나 호정도 영작의 애인도 병한도 그런 연민 때문에 자신을 구속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모두 자신의 삶을 위해 떠났고 결국 버려지는 것은 남성들이었다.

두 남자는 현실세계에서 호정이나 병한이 어떤 비난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두 남자는 그런 남자들에게 호정이 말한 것처럼 “신경 끄고 너나 잘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실천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남자들이 지금처럼 가부장제의 모순을 버리지 못하고 버둥거린다면 끝내 영화 속의 남자들처럼 ‘아웃’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힘들게 살았지만 뒤늦게 자신의 인생을 찾은 병한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누구에나 병한처럼 뒤늦게 초등학교 동창과 같은 자신의 이상형을 만나는 행운이 올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남자가 삶을 행복하게 하는 필수조건이라고도 할 수 없다. 딸, 아내, 며느리, 어머니라는 역할 보다 자신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제 여성도 남성도 그것을 보다 빨리 깨닫고 도덕의 껍데기를 벗어던져야 할 때가 왔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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