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8월 2003-08-01   821

외계인이 생각나는 순간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위해 직접 시청자들이 카메라 앞에 서는 5분 짜리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시청자칼럼 우리사는세상>. 처음엔 그다지 오래 갈 것 같지 않았던 이 프로그램이 방송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을 훌쩍 넘겼고, 주인공이 된 시청자 수만 해도 1000명을 넘어섰다. 방송에서 제기한 사회의 불합리한 문제들이 1000가지가 넘었다는 말인 만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찾아간 주무부서의 숫자 또한 만만치 않았다. 관공서의 담당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 인터뷰를 꺼리기 마련이다. 어쨌든 자신들의 역할이 악역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면 갑자기 어지럽다는 등의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상황을 모면하려 하거나, 들어서자마자 호통을 치며 기선을 잡아보려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치러야할 시험(?)이기에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제기한 시민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이럴 경우,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법타령’과 아무리 법이 그래도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상식’의 충돌이 시작된다. 시민들의 문제제기는 대부분 상식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법이라 할지라도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인간이 상식을 안다는 것은 거의 본능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일한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면 상대방이 외계인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중국동포 장씨는 1998년 한국 남자와 재혼해서 국적도 한국으로 바꿨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둘이 있는데 장씨는 이들을 재혼한 남편 호적에 양자로 올린 후, 한국에서 같이 살기 위해 두 아들에 대한 입국신청을 했다. 그런데 열세 살 난 둘째 아들은 입국이 가능했지만 성년이 된 첫째 아들은 부모와 같이 살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사증발급을 받지 못했다. 법무부는 유독 중국 국적 성인 자녀들에게만 사증발급을 꺼렸다.

장씨는 대한민국이 법 앞에 평등을 약속한 민주국가라면 당연히 모자를 함께 살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카메라 앞에 서서 호소했다. 방송출연 후 장씨는 한 인권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법무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사증을 발급하라는 원고승소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기뻐하긴 일렀다. 법무부는 법원판결을 무시한 채 방문동거가 가능한 사증을 발급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장씨는 방송에 다시 출연, 왜 법원판결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것인지, 왜 자식과 함께 살 수 없는 것인지, 법무부에 아주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하지만 정식 인터뷰를 거절한 채 담당자는 전화로만 짤막하게 답했다. “법원의 판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의무이행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리고 성년이 부모와 함께 산다… 이거 설득력이 없어요. 외국인이 자기 마음대로, 멋대로 자격이 필요하니까 자격 달라고 하면 무조건 줍니까? 줘요?”

외계인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이쯤 되면 어떤 항의를 하더라도 이견을 좁히기가 쉽지 않다. 장씨는 체념한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법무부에서 법원판결을 중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한국에서는 자식이 크면 부모와 떨어져 사나요? 그게 상식인가요?”

소리 높여 떠드는‘개혁’보다, 일상적인 일에 대한, 거창하지는 않지만 ‘상식’에 바탕을 둔 주무부서의 일처리 문화가 아쉬운 순간이었다.

박혜령 한국방송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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