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1월 2002-10-30   710

시민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시민운동이 만일 사회적으로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소외 계층을 지향한다면, 시민의 핵심 주체세력은 자연스레 ‘민중’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또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지 하는 것 등에 관한 엄정한 논의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시민운동이 어느새 천하를 주름잡을 듯이 우렁차게 활보하는 새로운 시대가 눈앞에 열리고 있다. 그런데 이 시민운동은 ‘전체 도시주민’을 위한 운동인가, 그렇지 않으면 ‘특정 계층’에 조준되어 있는가?

어쨌든 개념뿐만 아니라 그 속성 면에서도, 이 시민운동은 지극히 모호하다. 자칫하면 “코에 걸면 코걸이” 하는 식의, 정체불명의 ‘적당주의’의 제물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시민운동의 역사는 지극히 짧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싹은, 극히 제한적인 수준에서나마 민주화의 기운이 감돌면서, 서서히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YS 정권의 등장과, ‘세계화’의 도래, 재야운동의 약화 및 시민운동의 대두가 동시다발형으로 이루어졌다는 측면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극심한 억압 속에서도 ‘겨울 공화국’을 굳건히 견뎌내며 민주주의의 명맥을 지켜오던 소위 “좌경·용공·폭력·혁명 세력”으로부터 이 시민운동이 그 생명의 싹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명심할 일이다.

그러나 시민운동이 싹 트기 시작할 바로 그 무렵, 세계화의 유령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화는 장기적으로는 국가 역할의 축소 및 시장 중심으로의 경제 구조 재조정을 강압하는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량실업의 위험이 존재하더라도 국가의 규모를 줄이고, 가난한 민중들에게 미미하게나마 베풀어왔던 사회보장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면서까지, 외국의 거대 자본에게 국내시장을 개방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실업의 증대, 사회적 안전망의 박탈로 이어진다.

따라서 강제되는 완강한 경쟁체제로 인해 탈락하거나 낙오하는 동료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증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의 사회적 고통을 함께 나누어지며, 이들에게 임시 피난처라도 제공해줄 수 있겠는가?

우리 시민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라던가 사회적 불평등의 개선 등 시장의 횡포에 대해 나름대로 일정한 제재 조치를 취하곤 했던 국가가 약화되어버렸거나 존재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화의 확산과 더불어 소비주의, 물신주의가 동시에 세계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도 ‘독주’의 자유만 있지, ‘공생’의 자유는 찾기 힘들게 되었다. 도처에 ‘시장 추종 형 인간’만 환대 받는다. 결국 사회적 약자는 핍박과 착취와 억압 속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시장 전제주의’와 시민운동

무엇보다 시장은 이른바 자유경쟁을 필수 불가결한 덕목으로 간주함으로써, 사회 구성원간의 공동체적 연대를 저지하며 이기심을 부추긴다. 이를테면 시장은 개인간의 경쟁, 이해관계 사이의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타협과 협력을 통한 공동이익의 실현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도덕의 파탄이나 공동체의 해체 등을 손쉽게 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윤을 뛰어넘는, 고귀한 문화 및 예술의 향유 욕구나 쾌적한 사회 환경에 대한 인간적 기대감을 짓밟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시장은 그 내부에 마치 평등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듯이 위장한다. 요컨대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과 특정 고용주 사이에는 노동력을 판 대가로 임금을 받는 평등한 교환관계가 체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노동자들에게는 자유가 없다. 무일푼의 노동자들이 노동시장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물론 법적으로는 철저히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탈의 결과는 굶어죽는 일 뿐이다. 아사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시장은 노동을 단지 하나의 상품으로만 취급함으로써, 인간의 육체를 파괴하고 인간적 환경을 황폐화시킨다.

이러한 시장에서의 투표는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시장에서 백만 원을 가진 사람은 1 원을 가진 사람보다 정확히 백만 배의 권력을 더 행사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국민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민주주의는 이러한 시장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거죽만 남게 된다. 이처럼 시장경제에 뿌리내린 자본주의하에서 자본가들이 특권적 지위를 향유할 수밖에 없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정치적 경쟁을 유리하게 이끌도록 만든다. 정치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돈, 시간, 그리고 표를 조직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 모든 면에서 자본가들은 절대적 우위에 서 있다. 오늘날은 ‘시장 전제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다. 이를테면 시장은 절대군주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인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통째로 몸살을 앓는다.

어쨌든 ‘시장 절대주의’의 화신인 세계화는 공동체의 공공이익은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원자화된 개인의 사적 이익에만 집착한다. 그리하여 민주적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고 자유경쟁의 미덕만을 강조하는 탓에 결국 ‘승자 독식 사회’를 잉태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계급, 민족, 인종, 지역간의 불평등만 심화되고 있다. 곧 ‘힘 센 놈이 최고’라는 약육강식의 ‘거인(巨人)주의’가 세계화의 정글 속에서 횡행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를테면 자본주의가 자랑스레 떠받들던 개인주의가 결국 전제적 거인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화 시대의 시장 독재체제에 맞서 싸워야 할 소명이 시민운동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지난 날 시장의 무분별한 폭력행사를 일정하게 규제해온 국가가 더 이상 맥을 추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제3의 대안으로 국가도 시장도 아닌 시민운동 집단이 힘을 결집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화 시대의 ‘거인주의적’ 시장주의에 의해 점점 약화되고 있는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재확립하기 위해, 시민운동 세력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특히 노동, 여성, 복지, 실업, 의료, 문화, 인권, 빈곤, 교육, 청소년, 환경, 장애자 문제 등속처럼, 국가의 힘에는 부치지만 그렇다고 시장에 내맡길 수도 없는 영역에서, 시민운동 세력은 자신의 숨은 역량을 자율적으로 발휘할 기회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운동 세력은 왕조 시대의 아전과 유사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일을 바람직하게 잘 해내면 지배세력과 피지배 집단의 효율적인 다리 구실을 떠맡음으로써 양쪽의 이해관계를 조화롭게 통일시켜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 못 풀리면 양쪽에서 협공 당함으로써 모두에게서 동시에 버림받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요컨대 시민운동 집단에게는 ‘중간자적인 존재’에 따르는 위험성이 항상 따라붙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가장 위험하고 기회주의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가장 원대한 일을 해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박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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