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1058

한국전쟁 52년, 아물지 않은 상흔 “민간인 학살”

“야산대”는 빨갱이가 아니었다


“1949년 6월 1일 형이 토벌대에 총살당했습니다. 저도 총살되기 직전에 살아남았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은 이홍대 씨(64세)는 한 맺힌 이야기를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52년 전, 12살 소년의 몸으로 겪은 참혹한 일을 떠올리자니 마음 속 깊이 복받쳐오르는 감정들을 다잡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

52년 전, 당시 경남 거제지역에서는 이씨의 형처럼 일명 ‘반도(叛徒)’ 혹은 ‘야산대(野山隊)’로 불리는 청년들이 산에 숨어 있다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이들은 1949년 5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산청, 고성, 통영, 남해, 양산 등지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20∼30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로서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들이 왜 산으로 갔는지, 무엇 때문에 토벌대들에게 총살당했는지는 지금도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1949년 5월 30일 거제 전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백호·호림·비호 육군부대들이 거제도에 진주하였다. 지역의 유지들이 토벌대를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1949년 5월에서 1950년 5월까지 토벌대가 두 차례에 걸쳐 무고한 민간인들을 ‘비합법적’으로 총살했다. 또 1949년 7월 18일과 22일 양일 간 산청군 시천·삼장면 주민 1000여 명을 ‘통비분자(通匪分子)’로 몰아 집단학살했는데, 희생자 중엔 여자들과 다섯 살도 안 된 어린이도 100여 명이 넘었다.

과연, 그들은 ‘빨갱이’였나?

이홍대 씨의 증언은 힘겹게 이어졌다.

“우리 마을(지세포)에 주둔한 토벌대 대장은 김종원이고, 대원들은 아주 악질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형님은 산에 있다가 내려와 자수하고 집에 있었는데, 그 날(1949년 5월 30일) 놈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경찰과 함께 온 토벌대에 끌려갔습니다. 지서 마당에 가보니, 아버지, 형님, 어머니, 삼촌까지 끌려와 있더군요.

한 쪽에서는 잡아온 사람들을 고춧가루 물로 고문하고 있고, 다른 쪽에는 젊은 여자로 보이는데 벌가벗겨진 채 거꾸로 매달려 말도 못할 고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다음날 오후 2시쯤 우리 가족은 장승포 공동묘지(지금 마전동 애광원 옆)로 끌려갔습니다. 그 때 40명 가량 같이 끌렸갔습니다. 가보니 미리 구덩이를 몇 군데 파놓았고 사격대처럼 보이는 나무기둥도 있더군요. 그들은 끌려온 사람들을 12명씩 나무기둥에 붙들어 매어 놓고 사격했습니다. 우리 가족 차례가 되었어요.

그 때, 부대장과 여러 사람들이 몇 마디 나누더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은 살려주고 형님만 총살했습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빨갱이들이 죽는 것을 보아야 한다. 너희들도 빨갱이를 도우면 이런 꼴이 될 거야’ 라고 협박했습니다.”

이씨는 “형님은 토벌대원들이 들이닥치면 제일 먼저 청년들을 빨갱이로 몰아 마구 잡아들인다고 하여 이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야산대원’이 되었고, 나중엔 자수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형님을 죽였어요”라고 말했다.

자수해도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

1949년 5월에서 1950년 5월 말까지 경남 전역의 산악지대는 일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과 아무 죄도 없이 빨갱이로 내몰린 젊은 청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우익단체 회원과 일부 주민들은 야경막(夜景幕)과 횃불을 들고 입산자들을 수색하거나 토벌대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계엄령이 일부 선포된 지역(거제·양산·산청 일대)에서는 골짜기마다 총소리로 가득했고 까마귀 떼들이 연일 모여들었다 한다. 거제나 지리산을 중심으로 산청·함양·함안·하동 일대에서는 전향한 야산대원이나 좌익인사들이 입산한 사람들을 지목하거나 비밀아지트를 폭로해 관련자들이 몰살되기도 했다. 이 선무공작(宣撫工作)은 토벌대와 경찰 유격대가 청년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활용한 방법이었다.

1949년 12월 30일 경남도경의 발표에 따르면 자수자가 5334명이고 대부분 30세 이하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부의 자수강조 기간에 큰 결심을 하고 산을 내려왔지만, 전쟁 전후 총살되거나 수장되어야 했다. 가녀린 삶의 희망을 안고 산에서 내려온 청년들을 기다린 것은 차디찬 죽음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일부 입산자들은 전쟁 당시에도 산에서 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다가 1950년 10월부터 52년 겨울까지 대부분 군경토벌대에게 죽음을 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은 ‘반도’ 혹은 ‘통비분자(通匪分子)’로 낙인찍혀 유가족들은 말조차 못 꺼내고 있는 실정이다. 한 예로 1949년 7월에서 11월까지 산청군 시천면과 삼장면에서 많은 주민들이 ‘통비분자’로 몰려 토벌대의 손에 학살된 사건이 있다. 김상수 씨(57세·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의 기억을 따라가보자.

“그 당시 원리 뒷산에 두 집이 살고 있었어요. 날짜는 확실히 기억을 못하고 여름철인데 지금의 우농원 근처에 1개 소대 병력이 50∼60명의 주민을 끌고 와서 그들로 하여금 구덩이를 파게 하곤 2열로 세워 놓고 총으로 죽였어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학살이 있었는데 착검한 총으로 찔러 죽이고 때로는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광경을 60∼70m 떨어진 곳에서 보았는데 청장년 층과 나이 많은 분들, 여자들은 있었으나 아이들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전에 육군 3연대 8중대가 공비 소탕을 위해 출동을 했는데 곡점 아래에서 1∼2명을 남기고 모두가 전사한 모양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골짜기에 사는 사람 전부를 공비라고 몰아 그런 일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1950년 2월 5일 양산 주둔 맹호부대(부대장 김종원 육군 중령)는 양산·동래·울산·밀양·청도군까지 토벌활동을 벌여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가축까지 도살했다고 한다. 그들의 만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잔학함에 치를 떨었다고 하며, 그 당시 우는 아이에게 ‘김종원이 왔다’ 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과제

학살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빨갱이 가족’이란 손가락질과 연좌제에 묶여 말을 잃은 채 살아왔다. 김금말악 씨(79세·거제시 능포동)는 “살아있다는 게 싫어질 때가 많았어. 자식들과 함께 먹을 것도 없이 거리로 내몰렸고, 지금까지 죄인처럼 살아왔어”라고 말했다.

서철안 거제 유족회장(70세)은 “50년 전의 잘못된 역사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고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위한 특별법’도 빛을 못 보는 마당이라 햇볕정책이니 민족화해니 하는 말들이 멀게만 느껴진다”고 말했다.

전갑생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