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7월 2002-07-02   374

투표는 미친짓이다

6·13지방선거 투표율이 48.9%에 그쳤다. 그 이유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온다. 되풀이되는 권력층 부정부패와 여야 정당의 신물나는 정쟁으로 인한 정치적 냉소를 이유로 드는 사람도 있고, 월드컵 열풍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한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투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훈계가 나오고, 심지어는 벌금을 물리자거나 투표용지 복권제를 도입하자는 제안까지 있다.

모두 좋은 뜻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죄송한 말씀이지만 할말은 해야겠다. 나는 투표하는 것이 ‘때로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합리적 경제인’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그럴 수 있다. 사람들이 월드컵 축구경기 입장권과 투표용지를 혼동해서 투표를 하지 않는 게 아니다.

투표장 앞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당신은 왜 투표를 합니까? 유권자로서의 의무와 ‘소중한 한 표’에 대한 설교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물어보라. 당신이 그 ‘신성한 한 표’를 찍는다고 해서 떨어질 후보가 당선되고 당선될 후보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꼭 그런 건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한 표 차이로 당락이 갈라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물어보라. 당신의 한 표가 당락에 직접 영향을 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데 뭐하러 번거롭게 투표장까지 오셨습니까?

유권자인 나는 불과 1만여 명이 투표하는 우리 동네 시의원 선거에서도 ‘내 소중한 한 표’가 당락을 좌우한다고 믿지 않는다. 몇만 명, 몇백만 명이 투표하는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선거에서는 더욱 그렇다. 2천만 명이 넘게 투표하는 대통령선거는 말할 나위도 없다. ‘나의 한 표’는 사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런데도 나는 더운 여름이건 추운 겨울이건 표를 찍으러 간다. 경제학 용어로 하면 불합리한 행동이요, 영화판의 예술 언어로 하면 ‘미친 짓이다.’

중앙선관위 위원장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투표를 꼭 해야 할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만 하지 않을 ‘합리적’인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투표를 하는 데는 ‘비금전적 비용’이 든다. 시간도 들고, 다리 품도 팔아야 하고, 햇볕에 얼굴이 그을리고, 겨울에는 얼굴이 틀 수도 있다. 그런 비용을 들였다면,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이 된다.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좋아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 그게 확실하다면야 그나마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어떤 경우일까?

무임승차형 기권과 생계형 기권 그리고 체제부정형 기권

첫째, 후보자들 사이의 우열이 너무나 분명해서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는 경우. 가나 가지 않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인데 뭐하러 가나?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경상도는 한나라당 후보가, 전라도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게 뻔했다. 그런데도 그쪽 동네에 투표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으니 그게 오히려 신기하다.

둘째, 후보자와 정당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아서 누가 당선되나 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경우. 누가 되든 똑같이 기분이 좋거나 나쁠 건데 왜 투표장에 가겠는가. 이 둘은 ‘무임승차형 기권’이다. 남들이 투표해서 결과가 나오면 거기 얹혀가는 것이다. 투표하러 가는 대신 낚시를 가거나 등산을 가는 게 낫다.

셋째는 ‘생계형 기권’이다. 하루하루 먹고살기조차 힘든 사람은 투표하러 가는 시간까지도 아껴서 돈을 벌어야 한다. 해외나 다른 지방에서 세일즈를 하거나 직업상 예정에 없이 집을 떠나 있어야 하는 사람은 부득이 기권할 수밖에 없다. 투표한다고 해서 선관위에서 일당을 주는 건 아니지 않은가.

유권자는 기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투표를 거부할 수도 있다. 만약 여러 정당이 경쟁하는 민주주의 제도 때문에 사회가 혼란해지고 경제발전에 지장이 있다고 확신하는 파시스트, 또는 선거라는 것이 겉보기에는 번듯하지만 사실은 소수 권력자와 부자만을 위한 정치적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믿는 아나키스트가 있다면, 이런 투표 거부는 ‘체제부정형 기권’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하지만 기존의 어떤 정당과 후보자도 나의 이익과 신념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경우에도 투표를 거부할 것이다. 이것은 ‘항의형 기권’이다.

낮은 투표율을 바람직한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투표율이 높은 선거가 더 합리적인 결과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이번 지방선거에서 시군구 의회 의원 후보 가운데 ‘기호 가’ 후보의 당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영남 지역에서는 무려 70%가 넘었다고 한다. 기초의원 후보는 정당 공천이 없기 때문에 번호가 없다. 추첨을 해서 가나다 순으로 정한다. 그런데 도지사, 시장 투표지에서 기호 1번 후보를 찍은 유권자들이 기초의원 투표지에서 제일 앞번호인 ‘가번’을 찍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른바 ‘묻지마 투표’다. 유권자들이 모두 투표장에 나와서 후보 이름도 모르면서 찍는 경우보다는, 열 명 가운데 하나만 나와서 후보를 정확히 알고 고를 경우 더 나은 후보가 당선될 확률이 훨씬 높다.

낮은 투표율은 ‘합리적 선택’의 산물?

투표를 하지 않을 ‘합리적’인 이유는 그밖에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별로 없다. 그런데도 선거 때마다 투표를 하는 사람이 많다. 왜 그럴까.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모두가 기권을 한다면 선거제도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유권자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기적으로 따지면 분명 손해를 보는데도 하던 일을 미루고 투표장으로 간다. 대통령 선거는 수천만 명이 이런 식으로 협력해서 벌이는 거대한 게임이다.

둘째, 투표행위는 정치적 연대감이나 소속감을 확인하는 절차로서 큰 의미가 있다. 유권자들은 정당의 정강정책과 후보자의 공약을 보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에 표를 주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정치인을 ‘찍어주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와 같은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연대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이러한 ‘연대의 기쁨’을 파괴하는 정치는 ‘무임승차형’과 ‘체제부정형’ 기권자를 양산(量産)한다. 여기에 ‘IMF 경제위기’의 후유증이 만들어낸 ‘생계형’ 기권자를 더하면 투표율은 더욱 낮아진다. 월드컵 응원과 시청 열기도 정치적 관심 저하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냉소주의와 무관심에 대한 근본적 책임은 일차적으로 비리 혐의로 줄줄이 쇠고랑을 찬 지방정치인들에게 있다. 그런 부패인물을 공천한 여야 정당 지도부와 당원들도 책임이 있다. 입법부를 대표하고 국회 운영을 이끌어 갈 국회의장을 뽑는 간단한 일조차 제때 하지 못한 채 민생과 무관한 싸움질로 소일하는 국회의원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오늘의 결론. 6·13지방선거의 낮은 투표율은 ‘합리적 선택’의 산물이다.

유시민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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