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2월 2002-11-29   1359

축구선수 홍명보 “영원한 리베로”가 꿈꾸는 깨끗한 세상

좀처럼 웃지 않을 것 같던 그가 2002 월드컵 본선 스페인전에서 승부차기로 골을 성공시키고 미소지을 때 국민들의 가슴엔 진한 감동이 전해졌다. 상대편 선수가 만만하게 볼까봐 경기중에는 절대로 웃지 않는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평소 웃음에 인색한 이유를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승리를 위해 심판의 마지막 호루라기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그는 진정 프로다.

5시간 30분 동안 버스를 타고 포항에 내려가는 길은 힘들었다. 초행길에, 그것도 도로표지판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포항에서 홍명보 선수의 숙소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속시간 5분전 핸드폰이 울린다. 그다.

“여기가 어딘지 찾기 어려우시죠. 먼저 포항제철이 어딘지 주변에 물어보시구요. 정문에서 직진하다 좌회전을 해서 다리를 하나 건너세요. 그리고나서….”

지금까지 누구와의 인터뷰에서도 받지 못했던 친절한 배려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경기장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아이들이 안쓰럽습니다

“뉴스 보셨어요? 초등학생이 학원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했어요. 저는 그런 기사를 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나도 세 살, 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있는데 그애들을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어린이집에 다니지만 그 아이들도 나이를 먹어 학원이나 학교생활에 지쳐야 한다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근황을 묻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홍 선수가 먼저 초등학생 자살 사건 이야기를 꺼낸다. 선수이기 전에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강조했다. 즐겁게 웃고 뛰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월드컵이 끝난 뒤 유소년 축구를 양성하기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어 화제를 모았던 그는 최근 환경운동연합 홍보대사도 맡았다.

“일본에서 활동을 하면서 그들이 쓰레기를 철저하게 분리수거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운동을 하다보면 목이 매우 아플 때가 있습니다. 공기가 나빠서 그렇지요. 그러던 찰나 축구협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홍보대사 제의가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구요. 평소 관심이 있던 문제라 흔쾌히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곤 포스터용 사진과 광고방송 찍은 것 말고는 별로 없지만요.”

시민운동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낙선운동 소식을 접하고 매우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관심을 많이 가질 예정입니다. 대통령선거요? 제발 깨끗한 사람이 당선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운동선수로서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엘리트 체육정책이든, 생활 체육정책이든 스포츠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후보라면 더 좋겠지요”라고 말했다.

타워팰리스에 대한 해명

그는 얼마 전 호화 아파트로 소문난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에 입주했다는 사실로 팬들에게 많은 질타를 받았다.

“98년 일본에서 축구를 할 때 휴가를 나와 집을 고르러 다녔습니다. 모두들 돈을 모으면 집부터 사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는 일본에서 운동을 하면서 정말 힘들었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목돈으로 집부터 사고 싶었습니다. 서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마음도 들지만 정말 열심히 모은 돈으로 집부터 샀고 그건 부끄럽지 않습니다. 분양을 받을 때는 강남의 다른 아파트 가격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요즘 들어와서 갑자기 그 집에 관심이 모아진 것이 놀랍습니다.”

세간의 질타에 상처를 받았을 법도 한데 깨끗하게 모은 돈으로 자신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집을 구입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오늘의 홍명보를 만든 것은 축구다. 축구를 하지 않았다면, 혹은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면 무엇을 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흔든다. 자기에게는 오로지 축구밖에 없다며.

“축구를 처음 시작할 때 부모님의 반대가 무척 심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축구를 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저는 축구를 해왔고 앞으로도, 다음 세상에도 축구만 하고 싶습니다. 제 자식들이 자라서 축구를 한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 겁니다. 내년에 미국에 가는데 한국으로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죠. 정말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한국축구에 받은 혜택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월드컵 이후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유소년 축구에 관해서도 담담하게 의견을 내놓는다.

“사회적으로 유소년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축구 현장에서 피부에 와닿는 변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월드컵은 많은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그러한 자신감과 관심이 선수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됩니다.”

그가 바라는 세상은?

“서로를 존중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는 항상 좋은 대우를 받기 원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남을 먼저 존중할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바라는 세상이다. 그가 쓴 책 『영원한 리베로』에는 월드컵 선수 선발과정에서 그의 부상에 대해 언론이 함부로 평가한 것 때문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사실이 고백돼 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거나 항의하지 않고 묵묵히 훈련에 몰입했다.

홍 선수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고 했던 어떤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축구에 대한 애정과 끊임없는 노력은 홍명보라는 큰 배가 좌초되지 않게 한 원동력이다.

가족들과의 만남이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법인데 요즘 가족들을 보기 어려워 힘들다는 홍명보 선수. 고별경기를 일주일 앞두고 만났던 그는 한쪽 다리를 다쳐 걷는 것도 부자연스러운데 훈련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진을 찍으면서 “제가 잘 못 웃죠? 사진에서는 환하게 웃어야 하는데”라며 미안해 하는 홍명보 선수. 미남도 아니고, 듣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달변가도 아니었지만 찬바람 속 훈련으로 거칠어진 그의 피부가 오히려 정겹기만 하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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