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4월 2002-04-10   1121

죽어버린 대학로에서

죽어버린 대학로에서


일요일이었던 3월 10일 낮 동안 모처럼 대학로가 ‘차 없는 거리’가 되었다.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었는데, 이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학로에서 열렸던 것이다. 차들로 가득 찼던 넓은 길은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길 양옆에는 여러 단체들에서 자리를 차리고 시민들을 맞고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날이었다. 아직 새잎이 나지 않은 길가의 버즘나무들도 한껏 봄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 불기는 했지만, 온몸으로 봄을 느끼며 큰길을 걷는 기분은 아주 좋았다. 종로5가 쪽도 혜화동 쪽도 모두 싱그러운 모습이었다. 전봇대를 놓고 전깃줄을 지나게 하지 않은 덕에 무참히 잘리지 않고 제 맘대로 잘 자란 아름다운 버즘나무들의 가지 끝에서는 이제 막 봄이 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 이 길은 주말마다 ‘차 없는 거리’로 바뀌었다. 그렇게 해서 이 길은 찻길이 사람 길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었고, 나아가 찻길이 본래는 사람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가 깨닫도록 해주었다. 이 점에서 대학로는 독특한 길이었고 중요한 길이었다. 자동차가 지배하는 이 도시에서, 비록 일주일의 하루뿐이기는 해도, 대학로는 길을 마음대로 걷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해방구였다.

그러나 그 즐거운 때는 금방 지나가고 말았다. 더 이상 대학로는 해방구가 아니다. 대학로는 일주일 내내 차들로 들끓는다. 심지어 최근에는 못생긴 중앙분리대가 설치되기도 했다. 이 분리대는 자동차나 폭주족의 불법운전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 분리대는 이 길이 이제 완전히 자동차의 길이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이번의 ‘세계여성의 날’ 행사에서 잘 드러났다. 길 양옆으로 자리잡은 여러 단체들을 돌아보기 위해 사람들은 분리대를 타넘거나, 아니면 멀리 떨어진 횡단보도로 가서 길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대학로는 차가 안 다니는 때에도 더 이상 길을 마음대로 걷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해방구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차가 안 다니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도 이제 대학로는 자동차의 거리이다.

대학로가 이렇게 변했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을 좇아간 서울의 유일한 길이었건만, 결국은 이런 식으로 대학로는 죽어버리고 만 것 같다. 대학로가 문화의 거리라면, 그것은 단순히 둘레에 극장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잠깐이기는 해도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 되었기 때문에 대학로는 문화의 거리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극장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문화의 거리로서의 대학로는 죽어버렸다. 교통이 문화를 먹어버린 것이다. 서울의 교통은 오래 전에 청계천을 잡아먹었고, 지금은 북한산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다. 그러니 대학로를 잡아먹은 것쯤이야 얘깃거리조차 안 될지도 모르겠다.

전두환식 문화통치의 상징, 대학로

이 길은 학살자 전두환의 폭력통치가 한풀 꺾인 때였던 1985년에 대학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제가 초기에 ‘무단통치’를 하다가 만세운동 뒤에 ‘문화통치’로 바꾼 것처럼, 전두환은 ‘폭력통치’만으로 안 되니까 ‘문화통치’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1981년의 ‘국풍 81’과 1985년의 ‘대학로’는 전두환식 ‘문화통치’의 한 상징이다. 전자는 실패했지만 후자는 성공했다. 물론 정말 문화적으로 성공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길의 둘레에서는 문화의 향기보다는 유흥의 악취를 더 쉽게 느낄 수 있으니까.

이 길은 흔히 ‘젊음과 낭만의 거리’라는 식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대학로’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대학생만이 젊음과 낭만을 즐길 자격이 있다는 뜻인가? 왜 ‘고등로’나 ‘중등로’는 없을까? 그렇지 않아도 학력차별이 극심한 전형적인 학력주의 사회에서, 단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학력주의 사회에서, 대학생을 위한 ‘젊음과 낭만의 거리’를 만들어 준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길은 대학생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 선봉에 선 것은 다름 아닌 대학생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런 대학생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국풍 81’이라는 엉터리 축제를 만들어내고, ‘대학로’라는 사이비 ‘젊음과 낭만의 거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로는 대학생들을 위한 거리가 아니라 정통성을 전혀 갖지 못한 전두환 정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길을 통해 전두환 정권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요컨대 대학생이란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고민하고 싸우는 존재여서는 안 되고, 그저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부르고 연극이나 보면서 낭만이 어쩌고 인생이 어쩌고 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서울대의 시위대열이 쉽게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서울대를 관악산 아래로 옮겨버렸다. 그 수제자인 전두환은 서울대 문리대가 사라진 자리에 대학로라는 것을 만들어 대학생들이 ‘낭만’에 빠져 현실을 잊어버리도록 만들고자 했다. 올바로 해결되지 않은 역사는 언제까지고 되풀이되게 마련이다. 박정희를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두환이라는 학살자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전두환 정권의 속셈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좋은 자리로 활용되었다. 그 한 정점이 1987년 11월, 이곳에서 치러진 백기완 선생님의 유세였다. 마로니에공원 입구에 연단을 마련한 이 유세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길을 가득 메웠다. 길 건너 서울대 의대의 담장 위에도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찼다. ‘민중의 시대로’ 나아가자는 백기완 선생님의 연설이 이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물결을 일으켰다. 지금은 자동차의 소음으로 시끄럽기만 한 이 거리에 희망이 물결쳤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이 길이 완전히 자동차의 거리가 된 데에는 이런 사정도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부의 잘못을 따지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하는 일이 흔해지자,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는 정부가 교통을 빌미삼아 이 길을 완전히 자동차의 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교통이 이 길을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멍청한 데다가 무도하기까지 한 정치가 이 길을 교통에게 잡아먹도록 내준 셈이다. 어찌되었건 결과는 같다. 대학로는 죽어버렸다.

마로니에공원 앞에서는 이렇게 심사가 복잡해진다. 길가에 만들어 놓은 작은 공연자리에서 기독교 선교단이 록풍의 선교음악을 시끄럽게 연주하며 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을 강요할 때면, 이렇게 복잡한 심사는 아예 참을 수 없으리만치 짜증스러워지고 만다. 이런 것보다는 차라리 ‘젊음과 낭만의 거리’가 훨씬 낫지 않을까?

마로니에공원 입구의 건너편에는 현수막 걸이가 서 있다. 종로구에서 세워놓은 이 볼품없는 현수막 걸이의 윗부분에는 ‘행복이 샘솟는 아름다운 종로’라는 글이 쓰여 있다. 기독교 선교단이 시끄러운 록풍의 선교음악으로 자신의 신을 강요한다면, 종로구는 이런 식으로 오가는 시민들에게 종로구에서의 행복을 강요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로 아름다운 종로구를 만든다면 누구라도 종로구에서 자연스럽게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이렇게 못생긴 현수막 걸이 따위부터 없애야 하지 않을까?

유흥의 악취가 난무하는 거리

마로니에공원은 좋은 곳이다. 이곳은 길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모임을 갖는 곳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치적 모임이 아니더라도 이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좋은 곳에도 언제부터인가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입구에 커다란 녹슨 쇳덩어리를 세워 놓았다. 도대체 이 녹슨 쇳덩어리는 이 공원과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이 녹슨 쇳덩어리가 없었을 때, 이 입구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이런 걸 세워놓는 게 문화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반문화적인 생각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이 공원의 입구는 좁다. 그런데 이곳에 이렇게 큰 녹슨 쇳덩어리를 세워두어야 했을까? 마로니에공원의 입구가 이 녹슨 쇳덩어리를 위해서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들어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야외 공연장이다. 이 공원 둘레의 건물은 모두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큰 나무들과 이 건물들이 어우러져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고전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본래 야외 공연장도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서 둘레의 건물들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천장이 없어서 비가 올 때면 공연을 할 수 없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햇살을 받으며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다. 어느날 이 야외 공연장이 사라지고 계단으로 둘러싸이고 높은 천장을 갖춘 새로운 야외 공연장이 들어섰다. 둘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야외 공연장이라기보다는 사실 실내 공연장에 가까운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해는 물론이고 별도 볼 수 없는 음침한 ‘방 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울시조차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야외 공연장을 ‘시설이 노후하고 위치가 부적절해 도시미관 저해 및 공원 조망권 훼손과 접근에 장애가 있어 왔다’고 평가하고 다시 또 새로 지었다. 물론 여기서 시설이 노후하다는 평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지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시설이 노후했다는 것인가? 건축은 시간의 때가 묻으면서 문화재가 되는 법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채, 본래의 소박하나 우아한 건물을 부숴버리고 엉터리 건물을 서둘러 지은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몇 년 되지 않아서 새로 짓게 된 것이리라.

또 다시 새로 지은 야외 공연장은 둘레의 계단을 없앴으나 높은 천장은 여전하다. 일단 이런 점에서 야외 공연장이라고 하기 어렵다. 밖에 있으나 여전히 ‘방 안’에 가깝다. 더욱이 이른바 ‘사이버 룩’이라고 하는 꼴을 하고 있다. 도처에 널린 게 이런 유의 건물들인데, 이곳에서도 이런 꼴을 보도록 해야 했을까? 바닥을 보니 ‘TTL 스퀘어’라고 쓰여 있다. 세상에, 마로니에공원의 야외 공연장은 어디 가고, 이 자리가 011의 광장으로 바뀌었단 말인가? 이 야외 공연장은 이제 야외 공연장이기에 앞서서 011의 선전물이다. 둘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야외 공연장의 모습은 돈을 앞세운 횡포일 뿐이다. 011도 대학로를 크게 한입 베어 먹은 것이다.

이 둘레는 서울대 문리대의 역사가 스며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의 아랫동네로서 더 오랜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이곳은 여러 가지 시간의 층과 결이 담겨 있는 곳이고, 문화적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곳에서 이곳만의 문화적 향취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서울의 어느 곳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유흥의 악취가 이곳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로는 죽었지만 낙산은 살아나고 있다

길가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커다란 버즘나무나 은행나무와 어울려 서 있는 모습은 사뭇 보기 좋지만, 그 건물들의 앞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간판들이다. 이 동네는 연극으로 잘 알려진 곳이지만, 이곳에 극장으로 보이는 건물은 거의 없다. 극장들은 대체로 못난이 상자형 건물의 지하에 자리잡고 있다. 나름대로 멋을 낸 건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문화적 향취를 풍기는 건물은 거의 없다. 예쁘게 보이기 위해 열심히 화장들은 했지만, 그 입구에는 악취를 풍기는 각종 오물과 쓰레기들이 쌓여 있다. 흉칙한 전봇대들이 곳곳에 서 있고, 난마처럼 엉킨 검은 전깃줄들이 하늘을 찢어발겨 놓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못난이 건물들과 악다구니 간판들과 쓰레기들로 가득 찬 이 동네가 과연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지구’란 말인가? 최소한 건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고, 길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울시는 ‘유흥지구’를 ‘문화지구’로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동숭아트센터 옆 골목길을 따라 낙산으로 오른다. 이 길의 입구까지 유흥의 물결은 이미 밀려들어온 상태다. 이 부근은 주택가였다. 그러나 이제 예전의 주택들은, 비록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을지라도, 대체로 술집들로 바뀌고 말았다. 성균관대로 이어지는 길 건너 동네까지 합해서 생각하면 이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인 ‘유흥지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골목길로 접어드니 이 동네의 예전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여러 가지 모습의 집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곳도 서울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다세대 주택지구’로 바뀌고 있다. 가장 윗부분에는 골목길을 따라 양쪽으로 5층짜리 다세대 주택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이 길에는 종일 빛이 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재건축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다세대 주택의 골목길을 지나 낙산으로 나아간다. 본명이 타락산인 낙산은 본래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었다. 경복궁 뒤의 백악이 서울의 주산이고, 그 앞에 자리잡고 있는 남산이 서울의 안산이며, 인왕이 서울의 우백호이고 타락이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본래 서울은 이 네 산을 잇는 도성의 안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크고 작은 구릉이며 개울들이 많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그 자취조차 찾기 어려운 지경으로 서울은 변하고 말았다.

낙산에는 얼마 전까지도 ‘시민아파트’가 서 있었다. 이제 그 자리조차 사라지고 지금은 낙산을 자연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망가진 서울의 역사와 자연이 조금은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낙산에서 보는 서울의 모습은 도성 안팎을 막론하고 끔찍하다. 제멋대로 들어선 건물들과 그 위로 드리워진 시커먼 매연층. 모두 역사와 자연을 무시한 파괴적 개발의 결과이다.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에 이르게 된 큰 나라의 수도, 그러나 삶의 질은 세계 150위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구의 도시.

낙산이 다시금 좌청룡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고 해도 이 끔찍한 서울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낙산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이곳에서 또 저곳에서 그치지 않고 벌어져야, 비로소 서울은 다시금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다. 청계천처럼 질식사 당한 개울들도 되살려야 하고, 잠시 쉴 수 있는 나무그늘도 곳곳에 만들어야 한다.

대학로는 죽었으되, 낙산은 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낙산이 제대로 살아난다면, 대학로도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 물론 그것은 서울이 앓고 있는 파괴적 개발의 상처를 아물게 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홍성태 상지대 교양학부 교수. 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 부위원장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