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5월 2002-04-28   912

저널리즘과 인물평론-대통령처조카와 시골군수

강원대 서준섭 교수가 편역한 『한용운 선집』(강원대 출판부, 2001)을 최근에 읽었다. 이 책에는 한용운의 시와 산문 뿐만 아니라, 그가 당시 일간지와 잡지에 기고했던 논설로부터, 중국의 선승 동안 상찰(同安 常察)이 지은 담화체 시 「십현담(十玄談)」에 대한 주해(註解)인 「십현담주해」까지 게재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확인한 것은 시인이자 승려였으며, 독립 운동가였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던 인간 한용운의 높은 정신세계였다. 이와 함께 또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면, ‘문학’에 대한 한용운의 관점을 확인했다는 것인데, 이 책의 편역자에 따르면, 한용운은 자신이 수행했던 글쓰기 전체를 ‘문학’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 criture)=문학’이라는 등식은 사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문학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근대문학사를 검토해 보건대, 가령 홍명희라든가 신채호와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문학관념을 토대로 자신의 글쓰기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계몽기에 이르자, 이광수를 포함한 당시의 젊은 문인들이 ‘문학=미(美), 정(情)’이라는 근대(서구)적 문학관을 수용하였거니와, 이렇게 수용된 문학관이 현재까지도 일반적인 문학의 정의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른바 문학비평이라고 하는 것 역시 ‘시, 소설, 희곡’ 등과 같은 특정 장르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 특유의 ‘전문성’을 확보했다는 차원에서는 높은 평가를 내려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느끼는 아쉬움은 이러한 ‘전문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글쓰기의 다채로운 스타일과 인식의 유려함을 개성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많은 저작들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을 낳게 된다는 점에 있다. 가령, 순문학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읽기와 쓰기에 자극을 주는 많은 ‘글쓰기’들이 존재한다. 가령

나는 고종석의 유려한 산문과 신문칼럼을 즐겨 읽고, 진중권의 촌천살인에 가까운 글쓰기에 경탄하기도 하며, 박노자의 중후하면서도 뜨거운 열기를 확인할 수 있는 칼럼에 동의하고, 강준만의 호쾌하면서도 예리한 구어체의 사회비평을 즐겨 읽는 편인데, 내게 이들의 개성적인 ‘글쓰기’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통합적 감동’을 주곤 한다. 때문에 나는 종종 이 잡다한(?) ‘글쓰기’의 매력을 밝히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들곤 한다.

미디어로부터 자유로운 독립 기자의 새로운 글쓰기

최근에 출간된 정지환 기자의 『대통령 처조카와 시골군수』(새움 간)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한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정지환은 월간 『말』지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의 날카로운 사회인식을 보여준 바 있다. 특히 『조선일보』 문제와 관련해 저자가 갖고 있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그를 ‘안티조선 전문기자’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만큼 저자가 써온 기사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올해 초 8년여간 재직해왔던 월간 『말』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독립 기자’라는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독립 기자라니? 그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힘들겠지만, 미디어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기자로서의 고유한 문제의식에 기반한 글쓰기를 자율적인 조건 속에서 수행해 가는 새로운 기자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미디어로부터 독립한 기자라고 하는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저자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그 활동의 일부가 이 책에 녹아들어 있다. 나는 이 책에 수록된 글의 밑그림을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를 통해 흥미롭게 읽어왔는데, 이 책은 『오마이뉴스』에 발표했던 기사를 수정·보완하여 출간한 것이다. 기사도 흥미로운 독서의 목록이 될 수 있는가? 저자의 일차적인 문제의식은 이 부분에 닿아있는데, 가령 “저널리즘이 결코 ‘시간의 쓰레기’가 아니라 ‘역사의 고전’이 될 수 있다”는 진술에서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내 개인적인 체험에서 볼 때도 ‘저널리즘’은 결코 시간의 쓰레기가 아니다. 가령, 근대계몽기의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기사들은 그 기사를 읽었던 당대인들에게는 ‘시사적’인 것으로 다가왔겠지만, 수십 년이 경과한 시점의 나에게는 한국적 근대성의 형성배경을 확인케 하는 소중한 역사적 사료로 간주된다(심지어, 신문에 실려있는 조악한 상품광고까지도 그랬다).

인물분석을 통해 역사와 사회의 본질 통찰

이 책에서 저자가 진행하고 있는 글쓰기는 ‘인물분석’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인물분석에 있어서도 이러한 저널리즘의 강점을 살려 그 인물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공간이자 배경인 역사와 사회의 본질을 통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물을 분석하는 방식을 범박하게 구분하자면, 두 측면에서 진행할 수 있겠다. 한 방향은 인물의 ‘내면풍경’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해당 인물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일단을 해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법은 소위 문학적 ‘작가론’에서 자주 활용된다.

그 반대방향에서의 분석도 가능하다. 특정한 인물의 행위나 사유의 구조화된 조건, 즉 현실과 역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역으로 인물의 내면풍경을 검토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주로 활용되는 것은 저널리즘에서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어떠한 방법이 활용되고 있는가? 그 두 방법 모두를 필요에 따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령, 친일파문제연구가인 임종국론인 ‘한반도 방방곡곡이 ‘보림재’ 되는 날’에서는 인물의 내면풍경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유승준이 오태양을 노래하다’에서는 병역거부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이슈와 배경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 후에, 가수 유승준과 양심적 병역거부자 오태양의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섬세한 자의식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표현은 오직 하나일 뿐이라는, 그리하여 작가는 그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기 위해 한 치의 타협도 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일사일언(一事一言)’의 원칙을 인물분석에 그대로 적용해본 셈이다.” 글쓰기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이 존재하지 않을 때, 모든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갈기는’ 것이다. 그만큼 ‘언어의 육체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터인데, 이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매우 투철한 것이어서 “개성적인 글쓰기가 나의 철학”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고백에 정직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면, 오늘날의 현실에서 ‘글쓰기=문학’이라는 등식을 무리하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글쓰기는 분명히 문학적이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을 읽은 자에게 또 다른 ‘글쓰기’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때, 어떤 ‘글쓰기’는 다른 ‘글쓰기’를 낳는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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