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2월 2002-12-01   559

“화장발”을 거부한다

어렸을 때 엄마나 이모가 화장대 앞에 앉으면 내가 먼저 흥분해 설쳤다. 미술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눈썹을 그리고 입술 옆에 애교점도 살짝, 꾹꾹 눌러 코티분을 바르면 누르스름하고 밋밋한 얼굴이 마치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배우처럼 변신하는 것이 하도 신기해 나도 크면 꼭 저렇게 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화장은 내게 큰 숙제로 다가왔다. 그때는 주로 방문판매원으로부터 화장품을 사게 되었는데 판매원의 말을 듣다 보면 기초화장품만도 최소 4가지, 색조화장품까지 다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경제적 부담도 부담이려니와 남이 하는 걸 볼 때는 재미있게 보였지만, 매일 아침 화장을 하려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뿐인가. 화장은 할 때보다 지울 때가 더 중요하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피곤에 찌든 날엔 화장도 안 지우고 잠에 빠져 버리면 잠결에도 ‘화장 지워야 하는데…’를 되뇌이게 된다.

그런데도 화장을 계속했던 이유는 화장을 안 하면 자신을 가꿀 줄도 모르는 게으른 여자로 치부되기 십상이고 또 맨얼굴로 남 앞에 나서면 예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화장을 안 하고 외출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 가면 처음 인사가 “어디 아프냐”이고 두 번째는 “립스틱이라도 바르지”이다. 그럴 때마다 한 두 번 화장을 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맨얼굴로 나다니게 된다. 처음에는 한마디씩 조언을 하던 사람들도 워낙 그러고 다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봐주게 되었다. 오히려 어쩌다 서너 달에 한번쯤 화장을 하고 나가면 보는 사람이 더욱 놀란다. 무슨 일 있냐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화장하는 게 마치 내 얼굴에 갑옷을 씌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하고 나면 내 얼굴인데도 화장이 망가질까봐 맘대로 만질 수도 없고 뭘 먹을 때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다.

오후에 피곤해질 때 얼굴을 싹싹 문지르거나 눈썹 주위를 눌러줄 수도 없고, 산에 오를 때면 땀에 젖어 끈끈한 얼굴을 그 맑은 계곡 물에 씻을 수도 없다. 특히 나는 산에서 물만 만나면 씻는 버릇이 있는데 화장을 하고 있는 다른 이들은 부러워하면서도 그걸 못한다. 화장 때문에.

한 2년 전부터 나는 파마도 하지 않는다. 물론 염색도. 어쩌다 머리 자르러 미장원에 가면 집요한 유혹을 받는다. 머리가 너무 새까매서 촌스러워 보인다느니, 여름에는 더 더워 보인다느니 하면서 코팅이라도 하기를 권한다. 하기야 요즘처럼 까만 머리털 찾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독한 파마약 바르고 두 시간쯤 보자기를 쓰고 있으면 약이 닿은 살갗이 빨갛게 부어 오르고 가렵기도 하고 그런 걸 꾹 참고 두세 달에 한 번씩 돈 들여가면서 한나절을 보내고 싶지 않다. 민우여성학교에서 배운 환경지식에 의하면 화장이나 파마나 염색이나 다 환경에 엄청 나쁜 영향을 주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지기 전에 우선 내 몸에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란 생각에 하고 싶지가 않다. 나이 탓인가?

내가 여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끊임없이 나를 몰아세우던 것들-외모의 기준들-에서 벗어나 이제는 있는 대로, 생긴 대로, 단순하게 내 몸을 마주 보고 싶다. 그리고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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