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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l  since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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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12월
  • 2002.12.01
  • 750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시간을 고민하다가,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담당자한테 전화를 걸어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되겠냐고 애원을 하다가, 에이 될 대로 되라지 뭐, 하면서 사무실을 나와 택시를 탔다. 생각대로 글이 안 풀려 답답한 데다 답답한 서울의 공기마저 겹쳐 답답증이 땅이 꺼질 정도로 무겁게 나를 눌렀다.

피곤해서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는데 택시 기사께서 혼자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끝에 가서는 정치인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험악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아저씨, 그 못된 정치인들한테 표를 줘서 뽑은 국민은 아무런 책임이 없나요?”

“그야 뭐…”

“제가 보기엔 국민한테도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여론조사를 하면 이번만큼은 인물이나 정책을 보고 뽑겠다 해놓고 막상 투표를 할 때면 주저 없이 지역감정에 근거해 표를 찍으니 영남에서는 한나라당이, 호남에서는 민주당이 싹쓸이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서울에서는 잘 사는 사람들 동네에서는 한나라당을, 못 사는 동네에서는 민주당을 뽑은 것 아니겠어요?”

“그럼 누구를 뽑습니까?”

“예를 들자면 지난 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창원에서 출마했는데, 왜 그 후보한테 표를 주지 않았죠? 정치가 이렇게 개판이 된 데에는 국민들의 선택도 크게 한몫한 겁니다.”

“그어∼, 민주노동당 한 사람 당선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저씨도 참, 한나라당을 모조리 낙선시키고 민주노동당을 모두 당선시켰으면 조금은 달라졌을 것 아니에요.”

“민주노동당 당원입니까?”

“당원은 아니지만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택시 기사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정치가 개판인 책임의 90%는 국민의 책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IMF 관리체제의 책임은 한나라당에 있는데 영남의 유권자들과 서울·경기 지역의 잘 사는 동네의 유권자들은 그 책임을 묻지 않았어요. 오히려 몰표를 줘서 격려한 셈이지요. 그러고도 정치가 잘 되길 바라면 지나가는 똥개가 다 웃습니다. 앞으로 정치인 죽이자는 말은 삼갔으면 좋겠어요. 제 얼굴에 침 뱉기입니다.”

언젠가 한국관광공사에 자문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일하는 과장이 너무 절망스러워 견디기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박정희 시대보다 절망스러운가요?”

“아니오.”

“전두환 때보다 절망스러운가요?”

“아니오.”

“그럼 노태우 때보다 더 나빠졌나요?”

“아니오.”

“그럼 김영삼 시절보다 더 상황이 나쁜가요?”

“아니오.”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

“혹시 신문을 너무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

“먹고 살 만한 사람이 진정으로 절망하지도 환멸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절망이네 환멸이네 하지 마세요.”

그걸로 얘기는 끝이었지만 내 마음은 참으로 씁쓸했다. 물론 정치판이 개판인 것은 사실이다. 한나라당은 몇몇 신문사와 야합하여 권력욕을 불태우기에 바쁘고, 민주당은 조직폭력배 따위의 손가락질과 혀끝에 놀아나고 있는 형국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망이라도 들었는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작자들을 수석비서니 장관이니 하면서 임명장을 주고 있지 않은가? 자기 식구들과 그 떨거지들을 챙기는 사이에 개혁은 아지랑이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회창 총재는 또 어떤가? 잔뜩 잘난 체하고는 있지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아래에서 ‘법대로’는 커녕 얼마나 권력의 시녀 노릇을 잘 했으면 오늘의 그 자리에 서 있겠는가? 정녕 ‘법대로’였다면 대쪽 판사가 아니라 대쪽 인권변호사를 했어야만 했다.

최근에 조찬모임이니 뭐니 하면서 경기고 동문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영화 제목도 있거니와 ‘나는 알고 있다’. 동문들한테 돈봉투를 준다는 사실을. 그 행위가 선거법에 걸리는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지만 조심하라는 충고이다. 당신 옷에 묻은 똥물에서 썩은 똥냄새가 벌써부터 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직시하라는 것이다.

새벽이 깊었는데 문득 간디와 네루다가 떠오른다. 간디와 네루다는 권력을 위해 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인도를 위해 생을 바쳤다. 진정 이 나라를 위해 생을 바칠 지도자는 없는가? 하기야 그런 지도자가 생길 만하면 암살하기에 바쁜 나라였으니….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패거리를 이끌고 있는 소위 대권 후보들은 간디와 네루다를 성찰해야만 한다. 어떤 경우에도 패거리 정치는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만행일 뿐이다.

그리고 위선에 길든 국민들도 패거리를 이끌고 나타나는 대통령병 환자한테 환호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누가 이 나라를 위하는 정치인인지 가려내야 한다. 그가 비록 앞에 나서지 않는 무명에 가까운 정치인이면 어떤가? 투표장에 가서 표에 붓뚜껑을 찍을 때 잠시만이라도 이 나라를 생각해보라. 이제 더 이상 후보가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동향이라고 표를 찍어주는 어리석은 행동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나쁜 놈일수록 표를 많이 받는가? 우리가 먼저 반성해야만 한다. 나라가 개판이라고 이민 운운하지 말고 손가락 먼저 분질러야 도리가 아닐까?

정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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