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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12월
  • 2002.12.01
  • 668
민심은 천심(天心)이 아니라 천심(賤心)이다.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는 민심은 하찮은 것일 뿐 아니라 누구든지 밟고 지나가는 천심(踐心)일 따름이다. 민심을 얻어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정권이 무엇 하나 민심을 속시원하게 헤아린 것이 있는가? 정치가 개혁되었는가, 인사가 공정한가, 권력형 비리가 사라졌는가, 지역주의가 개선되었는가, 빈부 격차가 해소되었는가, 검찰이 바로 섰는가, 수구세력을 청산했는가, 개혁입법이 성취되었는가, 나라 살림살이가 나아졌는가. 어느 것 하나 그렇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민심은 재벌해체를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잘 사는 사회를 원할 따름이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겠다는 노동자는 무더기 해고로 길가에 내모는 반면에, 경영이 부실한 재벌에게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들어붓다시피 한다. 민심을 우습게 안 탓이다. 민심이 밟히면 민심은 돌아서고 옮겨간다. 그래서 민심은 천심(遷心)이다.

이 천심이 작동하여 정권교체도 이루어냈다. 개혁을 원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김대중정권은 말만 개혁을 앞세웠을 뿐, 처음부터 민심을 외면했다. 군부정권의 실세가 입당하면 부총재 감투를 주었으며 수구세력인 유신본당과 짝짜꿍하여 집권했다. 그러느라 내각제 개헌이라는 거짓 약속에서부터 ‘의원 꿔주기’라는 별난짓까지 다 했다. 더군다나 국무총리 면면을 보자면 김종필에서 박태준, 이한동 등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군부정권출신 인물이다. 만일 박정희가 살아난다면 놀랄 일이 아닌가. 자신과 함께 벌써 무덤에 들어갔어야 할 군부세력들이 버젓이 총리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사청문회를 부르짖던 이가 총리는 물론, 장관 인사까지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해서 사흘 장관, 보름 장관, 한 달 장관에 이르기까지 단명장관들이 수두룩하다. 면장감도 안 되는 인물을 내 편이라고 장관에 앉히고 비리에 연루된 인물을 충성파라고 장관으로 승진시키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낙하산 인사와 지역편중 인사도 구태를 벗지 못했다. 마침내 여당의원들조차 호남독식이라는 비판을 하며 인적쇄신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무엇 하나 진실되어 보이는 면모도 없다. 국민들에게 거듭 다짐한 내각제 약속은 애초부터 술수라 하더라도 다른 약속들은 좀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제 입으로 한 국정쇄신 약속을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하고도 시치미떼는가 하면, 애꿎은 가뭄 핑계로 어물쩍 넘겨버릴 만큼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일도 버젓이 했다. 정권교체와 더불어 진보진영에서 언론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대통령은 오히려 방일영 『조선일보』 전 고문에게 언론문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금관문화훈장까지 주면서 어깃장을 놓았다. 밀월관계를 맺고자 훈장까지 주고서는 뒤늦게 사주를 구속하며 법석을 떨었으니 그 속셈을 알 만하다.

가장 결정적인 잘못은 검찰권의 훼손이다. 강골검사 심재륜의 옷을 벗기고 정치검사 김태정을 법무장관으로 발탁한 데서 속셈이 드러난다. 대통령 아들을 사법처리한 심재륜은 해임시키면서 검사들의 퇴진요구까지 받고 옷로비 사건에도 연루됐던 김태정을 법무부 장관으로 승진시켰다. 결국 김태정은 구속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심재륜은 법원의 복직판결에 의해 다시 고검장이 됨으로써 사필귀정의 보기가 되고 있다. 오죽했으면 여당의원조차 “검찰을 권력의 시녀로 이용”했다고 비판하겠는가.

지금 민심은 김대중정권이 썩 잘 하는 걸 기대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못할 수는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이제 더 이상 잘못을 안 저지르기만을 기대한다. 다 썩어도 청와대는 안 썩어야 하고 모두 뒤가 구려도 대통령만은 당당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은 잘 알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중권의 떳떳하지 못한 관계를. 광주민중항쟁의 책임자인 노태우로부터 20억을 주고받은 두 김씨끼리 청와대 비서실과 집권여당을 장악하고 있다고 수군거리기까지 한다.

민심은 혼란스럽다. 정권교체를 한 ‘국민의 정부’라고 하면서 총리와 국정원장, 비서실장 등 이른바 빅3라고 하는 권력 핵심 자리에 김종필, 이종찬, 김중권 등의 군부출신을 중용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박준규까지 국회의장으로 밀었다.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일제 앞잡이를 중용하여 권력을 장악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오죽하면 박정희 향수가 다시 살아나고 그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감으로 거론될까. 그러고서도 ‘국민의 정부’를 자처하고 제2건국을 표방하는가. 이승만이 잘못한 대한민국 정부의 근본적인 실책을 바로잡는 일이 제2건국이어야 하는데, 그 잘못을 고스란히 답습하면서 제2건국이 웬말인가.

대통령은 민심에 영합하지 않고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역사에 남으려면 역사의 진보와 함께 가야 하는데, 도리어 거꾸로 가고 있다. 우리를 더욱 서글프게 하는 것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김 대통령의 정치적 실패가 김대중 개인의 실패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화 세력의 집권과 정권교체의 의의를 무색하게 함으로써, 앞으로 진보진영의 개혁운동을 가로막는 역사적 장애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던 비판적 지지자들의 실망은 문제도 안 된다. 역사적인 정권교체로 전라도 민중들의 30년 한을 풀어주리라 믿었던 김대중정권이 이제 전라도 사람들의 긍지를 훼손하고 마침내 그들을 남세스럽게 만들고 있다니 안타깝다. 이미 옷로비 사건으로 물의를 빚을 때 현 정부의 탯자리라 할 수 있는 목포 어른들조차 시국성명을 내지 않았던가.

민심은 천심이면서 또한 민심(敏心)이다. 진심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면 금방 지지를 보낼 만큼 민감한 정서가 바로 민심인 것이다. 따라서 민심을 돌리는 일도 어렵지 않다. 굳이 남을 제 뜻대로 개혁하려 들지 말고 먼저 자기개혁부터 할 일이다. 남을 개혁하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지만, 자기 개혁은 스스로 실천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럼 어떻게 자기 개혁을 할 것인가. 그것도 걱정할 것 없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줄곧 주장해오던 일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기가 했던 말조차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지금 민심은 천심(喘心)이기도 하다. 속이 끓고 있다는 말이다.

임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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