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10월 2019-10-01   2600

[특집] 아시아인 되기 또는 안 되기

월간참여사회 2019년 10월호 (통권 269호)

 

홍콩시위, 한일관계, 미중 무역전쟁…지금 아시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국가 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시시각각 변하는 동북아시아의 현재를 들여다보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토대로 하는 아시아 시민 연대의 가능성을 사유한다. 

 

 

아시아인 되기 또는 안 되기 

글. 이지연 영국 노팅엄 트렌트 대학 교수 

 

 

아시아인, 스테레오타입과 정체성 사이에서 

세계 스크린을 주름잡아온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백인 남성 중심주의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그런 할리우드가 다양성이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여성 영화인들의 도전뿐만 아니라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 American,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화인들의 도전이 두드러졌다.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이 주로 출연하고 제작한 영화 <문라이트>는 2016년 아메리칸 필름 어워드에서 베스트 영화상, 인종주의를 공포의 주된 소재로 삼은 영화 <겟 아웃>은 2017년 베스트 오리지널 스크린 상을 받았다. 2018년에는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의 블록버스터 영화 <블랙 팬서>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동시에 할리우드에서 상대적으로 주변화되어 있던 아시안 아메리칸들도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2016년 마블이 만든 영화 <닥터 스테인지>에서는 티베트계 후손인 신비로운 캐릭터 역에 틸다 스윈틴이 캐스팅되고, 2017년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고전인 <공각기동대> 실사판 영화에 주인공 역으로 아시안계 여배우가 아닌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되면서 영화 팬들과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이라며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크게 비판했다. 

 

흥미로운 점은 <공각기동대>의 감독인 오시이 마모루가 스칼렛 요한슨 캐스팅에 대해 오히려 적절한 캐스팅이라고 지지했다는 점이다. <공각기동대>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SF이며, 비록 여주인공이 일본 여성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사이보그이기 때문에 굳이 일본계 배우가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변론이다. 그렇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요구되는 정체성과 스테레오타입 사이를 조율하고 연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시아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은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이고 누군가에게는 타자를 인식하는 도구다. 혹은, 국가를 가로지르는 아시안이라는 정체성은 누구의 것이고 언제 유효할 수 있을까?

 

‘탈 화이트워싱’ 움직임이 말해주고 있는 것

화이트워싱은 비단 최근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초기 무성영화 시대부터 아시아인 캐릭터는, 길게 찢어진 눈처럼 아시아인들의 얼굴을 과장하는 약간의 분장만 하면 백인 배우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역할로 받아들여졌다. 소위 말해서 백인 배우들의 ‘옐로우 페이스’ 연기는 일상사였다. 반면 악역이나 주변부 역할에는 아시안계 배우들을 기용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아시아인의 스테레오타입을 연기하고 과장하는 연기를 해야 했다. 예를 들면 과장된 악센트를 한다거나, 순종적이고 신비스러운 동양 여성 또는 야만적이거나 성적으로 거세된 동양 남성 등의 이미지로 성적대상화 되었다. 

 

얼마 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에서 ‘브루스 리이소룡’ 캐릭터를 희화한 것에 대한 비난이 일고 있는 가운데, 브루스 리가 살아생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백인 배우가 맡아서 희화화된 일본인 캐릭터를 보다가 견디지 못하고 극장을 뛰쳐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만큼 당시 ‘옐로우 페이스’ 연기는 다반사였고 아시안계 배우들은 주변부의 스테레오타입의 역할들로만 할리우드 스크린에 등장해왔다. 

 

최근의 이런 ‘화이트워싱’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지금까지의 할리우드의 관행을 그대로 참고 보지 않겠다는 불만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불만의 중심에는 미국 주류 사회에 등장한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존재가 있다. 경제적으로 중산층인 그들은 무시할 수 없는 미디어 소비층을 이루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미국의 미디어 및 언론 산업에 다수 진출했다. 이들은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미디어에 빈번하게 출연하기 시작했고 제작과 배급, 마케팅 등에도 참여하고 있다. 

 

할리우드보다 먼저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건 TV 스크린이었다. 90년대 말 <앨리 맥빌>에 출연한 루시 리우, 2000년대 <로스트>에 한국인 커플로 출연한 다니엘 대 김과 김윤진, <히어로즈>에 출연한 오카 마사요리, <그레이즈 아나토미>의 산드라 오, 2010년대 <커뮤니티>, <닥터 켄> 등에 출연한 한국계 코미디언 켄 정, <더 기프티드>의 제이미 정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부터 미국 ABC에서 방영한 <프레쉬 오프 더 보트>는 대만에서 이민 온 가족의 이야기를 가장 미국적인 TV 장르라고 하는 시트콤 시리즈로 다뤄져 올 가을 시즌6가 방영될 예정이며, 안정적인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전 지구적 미디어 환경 변화 속 아시아가 부상하는 이유 

이런 아시안계의 부상은 아시아 및 중국계 배우들이 총 출연하고 아시안계 감독 존 추가 만든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의 미국 내외 박스오피스 성공으로 정점에 달한 듯하다. 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신데렐라인 여주인공 역은 <프레쉬 오프 더 보트>에서 엄마 역을 연기한 콘스탄스 우가 맡았다. 싱가포르 최대 갑부 집안의 상속자 역할은 영국과 말레이시아계 혼혈인 헨리 골딩이 맡았으며, 삼각관계의 갈등을 이끌어가는 이 갑부 집안의 어머니 역할은 홍콩, 할리우드를 넘나들며 오랫동안 활약해온 양자경이 맡았다. 이외에도 켄 정과 중국계 미국인 래퍼 아콰피나가 코믹 조연으로 출연한다. 

 

아시안 아메리칸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적으로 반응한 이유로는 이 영화가 <조이 럭 클럽> 이후 25년 만에 아시아 및 중국계 배우들로만 찍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였다는 점을 꼽는다. 그만큼 목말라 왔다는 얘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주 배경인 싱가폴과 말레이시아의 상류층 생활을, 할리우드 특유의 로맨틱하고 전형적인 이국적 풍광으로 배치한다. 조연들의 코믹 연기와 뮤지컬 같은 음악은 편안하게 감정들을 조율한다. 영화는 빈부의 계급차뿐 아니라, 개인의 꿈을 좇는 미국적 가치와 가족을 중시하고 개인을 희생하는 중국적 가치를 대립각으로 내세운다. 전원 아시안계 캐스팅이지만 누가 보더라도 쉽게 감정을 따라가며 때로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익숙한 영화다. 어쨌든 이 영화의 성공으로 더 많은 아시안계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들이 미국 내에서 제작, 배급될 수 있는 물꼬를 튼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 같은 아시안 프로덕션, 아시안계 배우들의 약진은 미국 밖의 전 지구적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도 깊게 관계되어 있다. 넷플렉스 같은 스트리밍 채널은, 크게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시장의 확장을 위해서도 이처럼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가 만들어지길 원하고 또 지원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들의 주된 시장이 북미나 유럽을 넘어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넘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중국 시장의 가능성과 잠재성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주된 관심사다. 대다수의 할리우드 대작들이 한두 명 정도 아시안계 혹은 아시아 스타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일은 다반사다. 중국과 합작하는 대작 영화들에 맷 데이먼이나 크리스찬 베일 같은 할리우드 A급 스타들이 기용되는 일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디즈니 스튜디오는 1998년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던 <뮬란>을 실사 영화로 제작하면서 뮬란 역에는 중국배우 류 이페이를 비롯해 대부분 역에 중국계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지금까지의 ‘화이트워싱’ 관행을 벗어나 중국 시장과 관객들을 의식한 캐스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셔널리티’가 아닌 ‘아시아낼러티’와 다양성으로 

그렇다면 글로벌 스크린에 더 빈번히 등장하고 주인공으로 재현되기 시작하는 아시안계 배우들은 과연 그 이전까지의 스테레오타입을 깨고 있는가? 올해 초 영국 BBC가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제작하려고 했던 중국계 가족 시트콤은 기획 단계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인종적 편견과 틀에 박힌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시트콤 속 할머니가 하루 종일 포츈쿠키만 먹는다는 설정 등이 그렇다. 이 드라마 제작 과정에 어떤 중국계 작가도 참여시키지 않았다고 지적하자 BBC는 다음과 같이 반박성명을 냈다. “우리는 작가나 프로듀서의 문화적 배경이나 국적 때문에 고용하지는 않으며, 그럼에도 영국 내 중국 커뮤니티를 성공적으로 재현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영국 내 아시안계 작가나 프로듀서가 그 문화적 배경이나 국적 때문에 커리어를 발전시키기 어려웠고, 그들의 얘기를 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한편 최근 ‘내셔널리티Nationality’를 대체하기 위한 신조어 ‘아시아낼러티Asianality’라는 말이 있다. 국가적 정체성이 아니라 아시아적 문화적 정체성 안에서 혹은 취향에 따라 좀 더 유연하게 세부 문화를 구분해 나가려는 표현이다. 2018년 산드라 오는 BBC아메리카가 제작한 <킬링 이브>로 TV시리즈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기존의 아시안 스테레오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용한 책벌레, 컴퓨터나 게임에 미쳐 사는 오타쿠, 극성스러운 엄마, 자기 가족과 돈만 아는 이기적인 이민자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 독특하고 개별적인 어떤 매력적인 여성이다. 스테레오타입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겠지만, 주어진 맥락과 상황 속에서 아시안으로서의 여러 정체성이 혼재하고 각축하며, 새롭게 성찰되고 만들어지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❶  아시아인이나 유색인 역할을 백인 배우에게 맡기는 것 

 

 

특집. 지금 아시아는?  

1. 아시아인 되기 또는 안 되기 이지연

2. 아시아여성들의 연대 28년 윤미향

3. 홍콩시위와 동아시아 국제연대를 위한 조건 홍명교

4. 미·중 무역마찰의 독해법 이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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