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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12월
  • 2002.12.01
  • 754
일본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결혼 상대자 직업 중에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은 정치가로 나타났다고 한다. 역사와 문화는 다르지만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불신은 한일 양국이 비슷한 것 같다. 주요한 정치행위 가운데 하나로서 선거는 정치의 축제이고 정책토론의 장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선거는 한편으로 정치불신과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불신과 불만을 오히려 증폭시켜 탈정치화의 계기로 기능하고 있다. “선거밖에 하지 않는 정치가, 투표도 하지 않는 국민”이라는 어느 정치행정학자의 책제목은 그러한 양국의 정치현실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민참여 민주주의의 정수로서 탄생한 정치가 시민들로부터 외면받는 정치현실은 한일 양국이 비슷하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정치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양국의 시민참가형 운동의 지향점과 기본 전략은 달라 보인다. 물론 양국 시민운동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이 다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시민참가형 시민운동을 비교하는 데는 무리한 대비를 이끌어낼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무리를 감수한 이유는 90년대 이후의 일본과 한국의 사회운동을 회고하고 전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판단의 준거틀로는 연세대 이신행 교수의 ‘영역-관계론’의 도움을 받았다.

민주주의 확장시킨 시민참가형 사회운동

양국의 시민참가형 사회운동은 정치불신과 불만으로 가득한 시민이 객석에서 무대로 올라가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지만, 기층운동의 활성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보인다. 먼저, 운동 후의 성과물을 ‘사회적 자산’으로 남길 그릇이 각 사회에 얼마나 존재했는가 하는 점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차이점은, 그 그릇이 얼마나 존재했는가에 따라 운동의 사회적 자산이 기존의 관심별·부문별·지역별 사회운동에 ‘재투자’되는 정도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운동을 발아시키는 ‘거름’으로 운동의 사회적 자산이 사용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의 낙천·낙선운동은 걸음마 단계에 들어선 관심별·부문별·지역별 시민운동의 소그룹들이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는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의 시민참가형 시민운동은 변동 지향적인 소그룹 간의 연대에서 더 나아가 ‘변동지향적 민의 연대’를 확장시켜 나가는 쪽으로 운동의 사회적 자산이 사용되었던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낙천·낙선운동이 ‘정치적 지평’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면, 일본의 시민참가형 사회운동은 민주주의를 ‘사회적 지평’으로 확장하는 것에 그 목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민투표운동의 전개과정 중에 형성된 새로운 소그룹들이 운동목표를 달성한 뒤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공신력을 갖는 NPO로 변신해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두 나라 운동의 차이점은 운동의 성과물이 어떻게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되었는가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의 시민참가형 사회운동의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생활자정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운동의 성과물이 정치의 일상화, 혹은 사회의 정치화를 도모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대한 판단에서 차이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운동의 성과물이 시민의 사회참가와 정치참가의 폭을 확장시키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교육·환경·육아·노인복지 등의 일감들을 사회운동의 새로운 의제로 전환시키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가 판단기준이 된다. 이러한 기준으로 본다면, 일본의 시민참가형 사회운동이 ‘참가형 정치’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낙천·낙선운동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시민 참가를 통해 정치를 둘러싼 ‘일상적 장벽’을 낮추고, 풀뿌리 수준에서 횡적인 ‘토론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 점에서는 일본의 시민참가형 운동이 한국의 그것과 비교해 소기의 성과물을 남겨 놓지 않았는가 싶다. 구린내 풍기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치가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의 ‘생활도구’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수많은 시민운동 그룹들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운동경험을 외부세계에 ‘발신’하는 기능을 활성화시키게 되었다든지 관심별·부문별·지역별로 ‘운동 투어’가 유행하게 된 것도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 견제한 한일 시민사회의 피플파워

그렇다면 일본의 시민참가형 사회운동이 우리의 시민사회운동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필자는 일본의 시민참가형 사회운동의 타깃이 국가권력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공공권역을 변화시키는 데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면 그들은 왜 지역사회의 공공권역의 변화에 운동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 것일까. 이는 현재의 일본사회가 정치제도의 개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시민참가형 운동이 채택한 전략은, 시민들이 생활현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공(共)적 관계망’의 형성을 통해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에 의해 독점적으로 정의돼왔던 ‘공(公)적 권역’을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는 재공공권역화 과정이 아니면 수많은 사회이슈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민참가형 사회운동이 발신하는 메시지 중의 하나는 다가올 미래사회의 대안을 만들기 위해 사회운동의 지향점을 ‘사회질서의 변화’라는 좀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목표하에서 설정할 필요성이 있으며 그 여정은 멀고도 길다는 것이다. 즉 운동의 성과를 일거에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신행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음미할 만하다.

“운동의 논리는 역사의 큰 흐름을 안고 있어야 하고 사회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통전적이라 함은 모든 사회적 현상이 상호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언뜻 보면 고이즈미정권의 등장에 의해 시민참가형 선거운동의 열기가 잠잠해진 듯 보이지만, 필자가 만난 활동가들의 목소리에서는 조급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사회의 판을 다시 짜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생활현장에서 시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형성해나가는 지난한 작업에 의해 비로소 완수된다는 체험적 인식이 그들의 몸 전체에 배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8월경 전개되었던 역사교과서 채택거부운동. 필자는 이 운동의 성과를 보면서 두 가지 유쾌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는, 풀뿌리 현장에서 일구어낸 사회적 정당성이 근린국제성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근린국제성이 양국의 국가주의를 견제할 힘을 발휘할 만큼 양국의 풀뿌리 시민권력의 힘이 생각 이상으로 성장해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양국 시민사회 간의 연대가 앞으로 활발히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글을 맺는다.

나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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