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2월 2002-12-01   1297

한국전쟁 51년, 아물지 않은 상흔 “민간인 학살”

총보다 더 무서운 “손가락총”의 비극


‘손가락 총’이라고 하면 요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말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여수·순천 인근에서 과거 여순사건 전후로 많이 쓰던 무시무시한 용어였다. 즉 특정 사람을 부역자라고 손가락질하면 손가락질당한 사람을 총살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행위를 ‘손가락 총’이라 불렀다. 낮에는 대한민국이,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는 마을에서 어느 한쪽이 들어와 다른 쪽에 협력한 사람을 색출해 낼 때,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 지적을 유일한 근거로 삼아 지목된 사람을 곧 적과 내통한 사람으로 간주해 즉결 처형했으니 인간사회에서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따라서 ‘손가락 총’이라는 말은 이웃 간의 신뢰가 사라지고 형제가 원수가 되며, 개인적 감정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르는, 한 사람의 증언이 타인의 목숨까지 좌우하던 그 험악한 세월을 상징하는 용어다.

부상당한 빨치산 소년을 도와준 사람은 모두 빨갱이

지난 10월 19일은 여순사건이 발발한 날이다. 나는 그 날 여순사건 기념학술행사와 피학살유족 증언대회에 참가하여 전라도 낙안 땅에서 발생했던 이 ‘손가락 총’의 비극에 대해 들었다. 낙안이라고 하면 요즈음은 민속마을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읍성이 옛 모습대로 잘 보전되어 있어 성 위의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동네를 구경하는 것도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색다른 재미다. 성안에 남아 있는 초가집들도 요즘 아이들에게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살던 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자료로 적격이다. 나도 가족들과 낙안읍성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낙안읍에 이처럼 비극적인 사건들이 발생했는지는 까맣게 모르고 단순한 관광객으로 돌아다녔다.

사건은 1948년 음력 8월 17일 낙안읍 신전마을에서 발생했다. 증언자는 사건 당시 3살이었던 사람으로서 이 사건 와중에 부모를 잃고,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들은 가족과 동네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증언한 것이다. 그는 이런 자리에 처음 나오게 되어 말을 잘못 해도 용서해 달라며 자꾸 단상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가, 주머니에서 원고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읽어내려 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쌍암 출신의 문홍주라는 14세의 소년이 인민군 연락병 노릇을 했는데 어느 날 빨치산이 이 소년의 치료를 동네 사람들에게 다소 협박조로 부탁하여 동네 사람들이 이 소년을 재워 주고, 밥해 주고 빨래해 줬다는 것이다.

치료가 끝난 후 이 소년이 승주에서 약국 운영을 하던 할아버지 집으로 가던 길에 이웃마을에서 동네 아이들과 말다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놀리는 데 격분하여 이 소년이 너희들을 혼내주겠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이상하게 여긴 면서기가 소년을 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경찰은 이 소년을 잡아 승주지서로 넘겼으며, 소년은 자신의 활동을 실토했다는 것이다.

결국 경찰은 소년을 앞세우고 동네에 들어왔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네 사람들을 마을 앞에 집결시킨 다음, 소년의 손가락 총을 활용하여 이 소년을 도와준 사람을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불려나온 사람들은 치료를 해 준 사람, 옷 세탁을 해준 사람, 먹을것 특히 누룽지나 홍시를 준 사람들이었다. 경찰은 이들 모두를 빨치산 혐의자로 분류하여 모진 고문을 가해 빨갱이 활동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이 소년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을 모두 모아 총살했다. 당시 이 동네의 세 살배기에서부터 육십 살 이상 노인까지 포함해 22명이 학살되었다.

총살당한 시신은 곧 기름을 붓고 태워버렸으며, 나머지 병력은 돌아다니면서 동네 집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평화스럽던 시골마을은 하루아침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물 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한편에서 들렸으나 아무도 손을 쓸 수 없었고, 다른 편에는 불타는 시체에서 내장 터지는 소리가 펑, 펑 하면서 들렸다고 한다.

단테의 지옥편도 이보다 더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동네사람들과 이웃마을의 한 어른이 인부를 사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갑자기 집과 재산을 몽땅 잃어버린 동네사람들은 거지가 되어 이웃과 친척의 도움으로 연명했으며, 모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언 땅을 갈고 농사를 지으면서 다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올 봄 이 마을이 도로포장을 하게 되어, 증언자는 처음으로 5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골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유골을 수습하여 안장을 했다.

여순지역에서만도 수천의 민간인 부역자로 처형

증언을 마치면서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 어느 누가 죄인이 안 될 수 있는가?…. 그런데도 힘 없고 돈 없는 유족인 우리로서는 지금껏 말을 꺼낼 수 없었다”고 울먹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적을 도와주는 일이 곧 죽음을 부른 천하의 대죄가 되는 상황이니 죄와 벌의 기준이 도대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사랑과 따뜻함도 맛보지 못하고 할아버지 밑에서 고아처럼 자라나 50년 세월 동안 힘겨운 삶을 꾸려온 그의 증언을 듣고 눈시울을 적시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산골마을 유족 중에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이 나오기도 어려웠겠지만 그런 사람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지위와 사업상의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이런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날의 증언자들은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이었으며, 전쟁의 비극은 바로 그 이후의 생존 조건의 처참함으로 직결되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증언자가 말하는 이 사건을 여순반란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공식 역사에서 여순반란사건은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려던 여수의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1주일 정도 후에 진압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반란군이 진압되고 잔병들이 지리산으로 입산한 이후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여수, 순천, 승주, 구례 지역에서 반란군과 지방의 좌익들에게 동조했다는 죄목으로 반란군에 의해 학살당한 경찰, 우익인사 규모의 몇 배를 넘어서는 수천 명의 민간인들, 어린 학생들과 무고한 청년들, 지역사회에서 명망을 얻고 지식인으로 추앙되던 사람들이 모두 부역자로 분류되어 처형당한 사실은 지난 50년 동안 철저한 망각 속에 있었다. 여수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부역자로 분류되어 즉결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목격한 『라이프』 잡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는 “이렇게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이 울 수 있었겠는가”라고 이 숨막히는 침묵 속의 즉결 처형 현장을 묘사한 바 있다.

한국전쟁은 1948년 말부터 시작됐다

이 날의 증언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의 시각조차 바꿔놓았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쟁이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여순지역의 경우 전쟁은 1948년 말부터 이미 시작되어 1950년 6월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이 마을의 참극에서 보여지듯이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말에는 현지 경찰이 부역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곧바로 총살하고 집을 불태워도 그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순천, 승주 지역의 각 동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무지랭이 농민들이 빨치산에 밥을 줬다고 해서 토벌대에 공개적으로 총살당한 일이나, 반대로 경찰과내통했다고 해서 빨치산에 의해 총살당한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즉 이 지역 사람들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한국전쟁은 이미 1948년에 시작된 것이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존 메릴도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1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은 하루빨리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이 ‘손가락 총’의 참극이 가감 없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 우리 사회에서는 진실로 무엇이 죄인지 어떤 사람이 벌을 받아야 마땅한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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