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617

일상의 부조리를 눈감지 말라

억척 아줌마의 집요한 작은 권리 찾기

“왜 작은 권리를 포기하죠? 이해할 수 없어요. 주위를 살펴보면 권리를 침해당하고도 참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권리는 찾으려고 노력할수록 커지는 법이니까요.”

보석가공기능사 박경숙 씨(29세·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그는 살면서 ‘이건 아니다’ 싶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는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숨겨진 권리 찾기에 나선다. 전화, 편지, 이메일, 항의방문은 기본. 소송 빼고는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다. 적당히 봐주고 넘기는 법이 없는 그는 골리앗에 맞선 다윗처럼 거대기업 등과 싸워 언제나 승리했다. 평범한 한 시민의 생활 속 작은 권리 찾기. 그 ‘투쟁’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미성년자에게 부모 동의 없이 핸드폰 가입시키다니

1998년 어느 날 박씨의 동서가 찾아왔다. 동서는 갑자기 울분을 터뜨리며 속 이야기를 꺼냈다. 미성년자인 동생이 동서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나가 동서의 이름으로 핸드폰을 구입한 것. 하지만 고등학생인 동생이 요금 지불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요금납부 독촉장은 쌓여가고 연체금액은 마침내 10만 원을 넘어섰다. 급기야 동생에게 명의를 빌려준 동서가 신용불량자가 될 지경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씨는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미성년자가 어떻게 부모의 동의도 없이 핸드폰을 구입할 수 있었을까? 왜 대리점측은 명의를 빌려주었던 동서에게 확인전화 한 통 하지 않았을까? 박씨는 먼저 동서의 동생이 핸드폰을 구입한 대리점을 찾아가 대리점의 과실을 따졌다. 당황한 대리점측은 동생이 동서의 주민등록증을 몰래 도용한 것으로 사건을 몰고 나갔다. 여기에 한술 더 떴다. 동서에게 그렇게 요금을 내기 싫으면 동생을 고발하면 될 게 아니냐고 목청을 높였다. 할 테면 한번 해보라는 기세였다.

대리점측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박씨는 미성년자의 핸드폰 구입 계약과 관련한 규정을 찾아보았다. 그가 확인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현행법상 핸드폰 가입과 관련해 미성년자와 계약을 맺을 때 가입지점은 법정 대리인의 동의서나 인감증명을 받아야 한다. 이후 명의자의 자필서명을 받거나 전화로 확인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법정 대리인은 이용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 뿐만 아니라 조건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대리점측과 더 이상 이야기 할 게 없다고 판단한 박씨는 S이동통신 전주지점을 찾았다. 대리점과 맺은 계약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10만 원이 넘는 연체금액을 낼 이유가 없다고 따졌다. 박씨는 계약무효처리도 요구했다. 그는 S이동통신 서울 본점과 정보통신부에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내용증명으로 발송했다.

박씨가 여기저기 발로 뛴 덕분에 그 계약은 조건 없이 무효 처리되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연체대금 10만여 원은 누가 냈을까? 미성년자에게 가족 중 한 명의 주민등록증만 가지고 오면 핸드폰 가입을 해 주겠다고 말했던 그 대리점이 본사에 납부했다.

쓰레기봉투는 왜 낱개판매 안 하나요?

1년 후. 박씨는 익산에서 성남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모든 이사 준비를 끝낸 후 마지막 문제는 세 장 남은 쓰레기 봉투였다. 익산시에서 구입한 쓰레기봉투를 성남시에서 사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먼저 박씨는 쓰레기봉투를 구입한 슈퍼마켓을 찾아갔다. 하지만 슈퍼마켓에서는 환불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원래부터 낱개 포장으로 나온다면 환불해 줄 수도 있는 문제지만 10장짜리 묶음으로 나오기 때문에 한 장씩 환불해 주면 슈퍼마켓의 손실이 크기 때문이란다.

“돈으로 계산하면 쓰레기봉투 하나가 얼마 안 하겠죠. 하지만 전국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돈도 돈이지만 제가 이 문제에 매달렸던 이유는 시청에서 약속을 안 지켰기 때문이에요. 쓰레기종량제를 처음 실시할 때는 낱개판매도 가능하고 환불도 해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환불하려니까 시청에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거예요.”

박씨는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시청 청소과에 항의편지를 보냈다. 그에게 돌아온 답변은 “시의회에 상정해서 통과해야 하는 문제라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담당자가 계속 시간을 끄는 사이, 이사 날짜는 훌쩍 지났다. 쓰레기봉투 세 장 때문에 이사를 미룰 수도 없었다. 계속 속을 끓이던 박씨에게 드디어 작은 소득이 생겼다. 시청 청소과도 이 문제에 매달리기 귀찮았던지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통해 환불을 해준 것이다. 비록 4000원 남짓한 적은 돈을 손에 쥐었지만 박씨는 권리 찾기에서 승리했다는 만족감에 젖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쓰레기봉투 하나쯤이야’ 하며 그냥 넘겨 버리는데 사실 쓰레기봉투 한 장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한 묶음을 사야 할 때의 속쓰림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박씨는 쓰레기봉투 낱개판매를 ‘쟁취’하기 위해 뭔가 할 게 없을까 고민중이란다. 무엇보다 박씨는 최근 시에서 재정 마련을 위해 쓰레기봉투 값을 계속 올리고 있는데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궁리중이라고 한다.

쓰던 세탁기도 하자 있으면 환불

지난 6월 21일 박씨는 큰맘 먹고 세탁기를 하나 구입했다. 친정 어머니가 집을 장만하셨는데 딸 된 도리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자신이 사용하는 L사 제품이 세척력이 우수하다는 생각에 L전자 대리점을 찾았다. 판매원은 기획상품이라 가격도 싸고 성능도 좋다며 드럼 세탁기를 권했다. 박씨는 다른 제품보다 세척력이 뛰어나다는 판매원의 설명에 그 제품을 선뜻 구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고장이 났다. 판매원이 장담하던 세척력도 일반 세탁기보다 훨씬 못했다. 박씨는 대리점을 찾아가 세탁기의 환불을 요구했지만 이미 사용한 세탁기를 대리점에서 순순히 환불해 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박씨가 아니었다. 박씨는 L전자 인터넷 홈페이지에 항의 글을 올리고 본사 고객상담센터에 여섯 차례나 민원을 넣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본사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아무 조건 없이 돈을 환불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히 이틀 뒤 돈이 입금되었다. 2001년 9월. 박씨는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박씨의 ‘극성스런’ 작은 권리 찾기를 옆에서 보다 못한 친정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단다. “너 그러다가 사람들한테 칼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남편도 완전한 아군은 아니다. 너무 나서지 말라고 말리는 편이다. 다만 시어머니만이 ‘똑똑하고 착한 며느리’라고 칭찬할 뿐이다. 박씨의 작은 권리 찾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시민들이 자신의 작은 권리들을 제대로 찾지 못하면 큰 권리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 생활 속의 작은 권리 찾기, 박씨만큼만 하자.

박정선영(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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