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3월 2001-03-01   1237

희망의 땅, 용산

전에는 서울의 변방이었으나 이제는 서울의 한복판이 된 곳, 용산이 바로 그곳이다. 서울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용산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 줄기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녹지축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서울의 생태적 재생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용산의 공간적 위치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용산의 명물이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용산 전자상가’를 들 것이다. 일본의 아키하바라 전자상가와 유사한 이곳은 과연 용산의 명물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용산의 진정한 명물은 이곳이 아니다. 이곳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으나, 어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곳, ‘용산 미군기지’야말로 용산의 명물 중의 명물이다. 필자는 용산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고 나아가 서울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용산 미군기지야말로 이곳을 대표하는 명물이라고 생각한다. 꼭 좋은 것만 명물이 되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미국인들이 즐겨 쓰는 지정학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의 배꼽 위에 자리잡고 있는 형국이다. 이 점에서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 같다. 미군이 우리의 배를 타고 앉아 얼마든지 희롱할 수 있다는 것을 용산 미군기지는 공간적으로 웅변해 준다. 미국과 우리의 관계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용산 미군기지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

배꼽 위의 미군기지

그러므로 이곳을 돌아보는 일은 결코 즐겁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도 가능하면 걸어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드넓은 지역을 걸어서 돌아보려면 다리가 몹시 아플 것이다. 그러나 다리보다 가슴이 더 아파야 한다. 그 아픔이 희망을 키우기 위한 거름이 될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를 돌아보는 일은 남산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곳에서는 드넓은 용산 미군기지의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어서 해방촌을 통과해 남산을 내려오면 용산고 아래쪽에서 이 기지의 담장을 만나게 된다. 이 담장은 남영동을 지나 삼각지로 동부 이촌동으로 서빙고로 이태원으로 이어진다. 그 길은 무려 다섯 개의 전철역이 자리잡고 있는 기나긴 길이다.

이 길은 사실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길이다. 이 점에서 이 길은 사실 서울의 중요한 관광로로 개발될 충분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한 나라의 수도에 이처럼 커다란 외국군 기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외국인들에게는 대단히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삼각지 주변의 ‘이발소 그림’ 전문 화랑들, 세계일보사 뒤에서 동부 이촌동으로 넘어가는 지역의 ‘불량주택 지구’, 그리고 이촌역에서 서빙고역까지 이어지는 용산 미군기지의 그 기나긴 담장. 이 모든 것들이 서울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이 길을 돌아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다리가 아프고, 그보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런 아픔들이 모여서 마침내 이 드넓은 땅을 되돌려 받고 생태공간으로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닦게 될 것이다. 이 길을 관광로로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디 ‘서울 투어’에 이 길이 포함되기를.

서울 속의 미국

서울역을 지나 한강로를 달려 남영동에 이른다. 갈월동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유명한 해방촌이 있고, 조금 더 가서 남영동 삼거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철길 가에 악명 높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있다. 그곳에서 삼각지까지 이르는 길은 바로 직전의 남영동과는 전혀 다르게 스산한 풍경이다. 길 양쪽으로 용산 미군기지의 담장이 죽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용산 미군기지라고 하면, 이곳의 삭막한 담장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러나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 용산 미군기지는 이것보다 수십 배나 넓은 규모를 자랑한다. 미군이 ‘용산 주둔지’(Yongsan Garrison)라 부르는 용산 미군기지는 그 총 면적이 105만 평에 이른다. 105만 평이라면 얼마나 넓은 것일까? 서울대공원의 3배, 어린이공원의 6배, 여의도 전체 면적보다도 넓은 땅이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비슷하고, 런던의 하이드파크보다는 두배나 넓은 땅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넓은 기지는 메인 포스트, 사우스 포스트, 캠프 코이너(Camp Coiner), 캠프 킴(Camp Kim)의 네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미군범죄』, 개마서원, 1999, 174~175쪽). 메인 포스트는 한미연합사령부를 비롯해 주요 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한미연합사령부 건물은 1978년에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면서 건축되어 현재는 유엔사령부와 함께 쓰고 있다. 한미연합사령부 지하에는 극비 지휘소인 ‘서울’이 있다. 한미연합사령부 건물의 맞은편에는 주한 미군 및 미 8군 사령부가 사용하는 오래된 2층 건물이 있다.

사우스 포스트는 메인 포스트의 맞은편에 한국 국방부를 감싸는 형태로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주택, 병원, 클럽, 스포츠센터 등 미군 장병들을 위한 각종 오락 및 편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아동센터, 초등학교, 대학교 등의 교육시설, 파파이스, 버거 킹, 베스킨 라빈스 등의 편의시설이 마치 미국을 옮겨 놓은 것처럼 잘 갖춰져 있다. 용산 미군기지가 ‘서울 속의 미국’으로 불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 주변에도 여러 가지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에 한미연합사가 옮겨갈 지하기지인 탱고(TANGO)이다. 이 기지는 전시에 한미연합사령관을 비롯한 한·미 양국군 지휘관들이 첩보위성 및 정찰기, 오산기지 및 미 본토로부터 각종 정보를 신속하게 받아 한·미 양국군을 지휘통제하는 두뇌이다. 미국의 최첨단 지휘·통제·통신·정보(C3I)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핵공격을 받아도 견딜 수 있는 화강암 속에 자리잡고 있다. 화학 및 생물학 무기에도 대응할 수 있다. 한·미 양국군 지휘관들은 평상시와 전쟁 발발 직전에는 ‘서울’에서 지휘를 하다가 전쟁이 본격화되면 ‘탱고’로 옮겨가게 된다.

용산 미군기지는 직접적인 군사적 기능 이외에, 한국전쟁을 계속 상기시키면서 ‘우방 미국’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수행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용산 미군기지는 미국의 분방한 대중문화가 유입되는 통로로 활용되면서 아예 ‘아름다운 나라’ 미국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두드러진 예는 대중음악 분야이다. 예전의 이름난 가수들은 거의 모두 ‘미 8군 무대’를 통해서 가수가 되었다. 패티 김이나 위키 리처럼 가수들이 영어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문화적으로도 용산 미군기지는 오랫동안 ‘서울 속의 미국’이었다.

서울의 사막

서울의 산들과 종묘를 빼고 본다면, 용산 미군기지는 아마도 서울에서 녹음이 가장 우거진 곳일 것이다. 이곳에는 비록 많은 시설들이 들어서 있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큰 나무들과 풀밭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용산 미군기지는 그 자체가 거대한 사막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의 오아시스이다.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쿠데타 이래로 전두환과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무려 30년에 걸친 ‘개발독재’는 사실상 ‘파괴독재’였다. 역사와 문화와 자연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이런 파괴를 통해 서울은 그 자체가 거대한 사막이 되어 버렸다. 자연의 사막은 황량해 보이나, 생태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이다. 그러나 역사와 문화와 자연이 모두 파괴되어 버린 인공의 사막은 휘황찬란해 보이지만, 시멘트와 자동차와 쓰레기로 뒤덮인 생태적 불모지이다. 서울은 이런 인공의 사막이다.

그러므로 푸르른 녹음을 자랑하는 용산 미군기지는 이런 서울의 오아시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산에 올라 용산 미군기지를 내려보노라면, 그 짙은 녹음에 자못 감동을 느끼게 될 정도이다. 참으로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절실히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서울의 사막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울이 사막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지만, 그 오아시스가 결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절망하게 된다. 높다란 블록 담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곳의 주인은 주한미군이다. 오아시스를 찾아 그곳에 가는 서울 시민은 주한미군 시설이니 무단접근하지 말라는 경고판의 위세에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의 사막이다. 그곳의 높은 블록 담과 철조망이 걷히는 날에야 그곳은 비로소 서울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남산의 수풀은 그곳의 수풀과 어우러져서 한강으로 달음질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북한산에서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녹지축은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의 사막이다. 그때까지 그곳은 서울이 사막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아프게 일깨워줄 것이다. 그때까지 그곳은 오아시스를 앞에 두고 타들어가는 우리의 기갈증을 더욱 심하게 할 것이다.

10년쯤 전에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슐츠가 성남 비행장에서 헬기를 타고 서울로 왔다고 한다. 용산 미군기지 상공에 이르렀을 때, 그는 수행원에게 ‘저기가 거기냐’고 물었다. ‘거기’란 용산 미군기지냐는 뜻이었다. 그가 이렇게 물은 까닭은 그곳이 시멘트 더미로 둘러싸인 광활한 녹지이기 때문이었다. 수행원이 그렇다고 하자, 그는 이곳은 서울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결과 주한미군은 1996년 말까지 용산 미군기지를 돌려주기로 약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91년에 주한미군은 이전비용 예상액을 17억 달러(1조8,000억 원)로 제시했으나, 1992년에는 95억 달러(7조2,000억 원)로 제시해 협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94년에는 북한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이전계획이 사실상 백지화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에는 심지어 포름 알데히드를 한강에 무단방류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도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의 사막이다. 그곳에서는 정의가 통하지 않는다. 혈맹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냉혹한 힘의 법칙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다.

희망이 움트는 땅

용산 미군기지는 미군이 지배하는 땅이다. 여기서 ‘지배’라는 말은 참으로 적절하다. 그것은 우리의 의사나 필요와 무관하게 점유되고 이용되고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용산 미군기지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예는 동작대교 북단이다. 이 다리는 원래 용산 미군기지를 통과해서 남대문 쪽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다리는 주한미군 측의 반대로 북단이 뚝 잘려나간 이상한 몰골로 서 있다. 그 앞에는 용산 미군기지의 골프장이 있었다. 1990년에 이 땅을 돌려 받아 ‘용산 가족공원’을 조성했을 때, 우리도 이런 공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적잖이 감동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공원은 두 동강이 나 버렸고, 한쪽에는 지금 ‘국립 중앙박물관’이 한창 들어서고 있다. 그 입구에는 미군 헬기장이 버티고 있다. 잘못된 부지 선정에 미군의 횡포까지 겹쳐 ‘국립 중앙박물관’의 미래는 아직 암울하기만 하다.

삼각지 쪽으로 넘어가 보자.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로 유명한 삼각지 교차로는 이제 철거되고 없다. 그것을 철거하자 그곳에서 남산을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주변 지역은 여러모로 어수선하다. ‘전쟁기념관’이라는 크고 깨끗한 건물은 이 지역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다. 그곳은 차라리 ‘국립 중앙박물관’이 들어섰으면 좋았을 자리가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그곳은 ‘평화기념관’으로 바꾸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 부근에는 일제 때 지어진 ‘적산가옥’들이며 그 뒤에 지어진 낡은 건물들이 뒤얽혀 있다. 그 곳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고여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용산 미군기지를 단지 그 지리적 경계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변 지역까지도 장악하고 그 변화를 통제하고 있다. 동작대교는 말할 것도 없고 지하철도 그것을 우회해서 빙 둘러간다. 그 담장을 따라 여기저기에 낡은 가옥들이 어지럽게 모여 ‘불량주택 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용산 미군기지에 의해 개발을 거부당한 결과이다. 그 동안 서울은 급격한 변화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이곳은 정반대의 상황에 고통받아 왔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용산 미군기지의 반환을 요구해 왔다. 이에 대해 주한미군 측은 ‘이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물론 지금은 그마저도 무산된 상태이지만, 사실 ‘이전’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주한미군은 기지를 통폐합하는 방식으로 용산 미군기지를 반환해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주한미군측이 보인 태도로 보아서 이런 식으로 용산 미군기지를 되돌려 받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길만이 올바른 길이므로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한다.

되돌려 받은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동안 서울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난개발로 크게 망가지고 말았다. 서울의 ‘생태적 재생’은 갈수록 긴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제 이 땅을 되돌려 받아 이곳에 ‘자연 숲’을 조성하자. 훗날 동부 이촌동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없애 버리고 이 ‘자연 숲’이 한강으로 이어지도록 하자. 이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자체가 생태적으로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이촌동에서 서빙고로 이어지는 용산 미군기지의 담장이 다르게 보인다. 그 안쪽에서 서울의 ‘생태적 재생’을 위한 우리의 희망이 겨울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홍성태 |사회학자·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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