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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00년 12월
  • 2000.12.01
  • 1889
“(버스나 전철에서)노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자리를 양보하지 마세요. 그게 시민정신의 출발입니다.” 몰상식하고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이 한마디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지난 학기 가톨릭대학교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인간학이라는 교양과목이었는데 아마도 그날의 주제는 ‘개인과 공동체’였던 것 같다. 그 자리엔 학생들 외에 신부님, 수녀님도 계셨다. 이렇게 강의의 말머리를 시작하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물론이다. 대체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권위가 상실되고 권력이 횡행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흔히 권력과 권위를 혼동하는 경향들이 왕왕 있는데 권력이 강제를, 권위가 동의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이를 엄격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권위 없는 권력이란 한낱 물리적 강제를 앞세우는 천박한 힘에 불과하다. 과거 전두환 씨가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취임연설을 하며 잔뜩 힘을 줘 벌름거리던 그의 콧구멍을 보면서 우리들은 그의 천박한 권력을 연상했으면 했지, 아무도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존경스런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집안에서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란 그저 엄격하다고 해서, 폼만 잡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돈 많이 가졌다고 부자의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고, 아는 게 많다고 스승의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인의 권위는 단지 나이가 많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권위를 권력으로 대신 메우려고 할 때 힘의 논리, 타율의 논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연로하거나 몸이 불편한 분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도리임에 틀림없다. 이런 미덕들이 존중되고 준용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시민사회가 자리잡을 수 있다. 버스나 전철에서 젊은이들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그저 나이가 많고 적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다. 양보와 배려와 존중, 감사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행위를 지배-복종의 권력행위로 치환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같은 의무와 권리를 가진 사회구성원인 다음에야 자리에 앉을 권리는 동등하게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자리양보가 노인들의 권력에 복종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보하는 이의 사람됨됨이나 교양에 관련된 일일 뿐이다. 양보를 안 한다고 해서 노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여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가끔 전철 안에서 핏대를 세우며 “요즘 젊은 것들은 위아래가 없다”고 언성을 높이는 노인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양보하지 않는 ‘젊은 것’들의 몰상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치로 말하자면 상대의 양보를 전제로 편의제공을 호소하는 마당에는 남녀노소 누구를 불문하고 공손히 하는 것이 마땅하다. 순서를 기다리는 줄을 섰는데 노인이라고 맘대로 새치기해도 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건 권력을 얻는 과정이 아니다. 권위는 (나 아닌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권력은 스스로 내세우는 것이다. 권위는 합의를 전제하지만 권력은 강제를 전제로 한다. 매를 앞세우는 선생, 나이를 앞세우는 노인, 돈을 앞세우는 부자, 공권력을 앞세우는 권력, 이들에게서 우리는 공경할 만한 권위를 찾지 못한다. 사실 ‘노약자 보호석’이나 ‘여성전용칸’을 별도로 운영해야 하는 우리 사회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이다. 오죽했으면 그런 규범의 강제까지 만들어야만 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물리적 강제나 힘의 논리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옳지 않다. 힘의 논리, 타율의 논리야말로 바로 시민사회의 적들이 아닌가.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 그런 배려와 친절에 고마움과 친절로 화답하는 사회, 그런 미덕과 가치들이 서로 존중하며 쌍방향으로 오고가는 사회야말로 진정 건강한 시민사회의 출발이 아니겠는가.

keenae@ hanmail.net
김형완 참여연대 협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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