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3월 2000-03-01   837

실험실과 알권리

이공계 전문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일반 시민들에게 ‘실험실’이라는 단어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다가갈까? 추측컨대, 그 이미지는 아마 두 가지 정도 될 것 같다. 하나는 밝은 조명 아래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환경에서 가운 입은 연구자들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거나 기기를 조작하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SF나 호러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분위기로 음침한 외딴 집에서 괴상한 몰골을 한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가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고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지식이나 기술을 연구하는, 마치 「프랑켄슈타인」에 나옴직한 이미지일 것이다.

얼핏보면 완전히 상반되는 듯한 이런 두 이미지는 흥미롭게도 많은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이 이미지들은 우선 실험실을 과학자들만이 전유(專有)하는 공간이자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공간으로 신비롭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여기서 실험실은 과학자들이 자연 속에 숨겨진 난해한 진리를 ‘발견’해 내는 공간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무식한’ 일반인들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앞서의 이미지들은 실험실이 ‘사회 관계’나 ‘세상의 잡사(雜事)’로부터 동떨어져 있고, 일반인들의 일상생활과는 무관한 어떤 곳이라고 가르친다. 대중매체들로부터 주로 얻을 수 있는 이런 이미지들로부터 우리는 실험실이 정치·경제·문화 등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사회로부터의 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비(非)세속적’ 공간이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과는 달리, 실험실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보다 넓은 사회영역으로부터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먼저 새삼스레 강조해야 하는 것은 실험실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제반 모순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실험실은 자연과 진리 사이의 신비스러운 ‘조응’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위계적인 인적 구조와 잘 짜여진 규율에 기반해 연구자들의 일상적인 ‘노동’이 반복해서 수행되는 장소로 파악돼야 한다. 이런 관점을 갖고 바라볼 때, 흔히 안전 사각지대로 불리는 대학 실험실의 문제가 제대로 재조명될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고려해야만 하는 점은 실험실이 결코 자족적인 공간이 아니라 보다 넓은 사회영역과 영향을 주고받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렇겠지만, 특히 유독 화학물질이나 유전자재조합 유기체(GMOs) 등을 다루는 실험실에서의 사고가 인근 지역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작년 9월의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폭발사고 이후 시작되어 현재 대학사회와 시민운동 영역에서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실험실안전운동’은 이런 맥락에서 정당성을 갖는 것일 터이다. 실험실안전 문제는 연구자들이 일상적인 노동의 장소에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권리와 의무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이 안전하게 살 권리의 차원에서도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며, 따라서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참여’의 맥락 모두에서 다뤄져야만 한다. 이런 주장은 한국사회의 맥락에서는 아직 다소 생소한 것일지 모르나, 구미 각 국에서는 이미 1960∼70년대의 사회운동 물결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바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70년대 후반 유전자재조합 실험실의 안전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에서 있었던 선례인데, 하버드대가 위치한 캠브리지 시에서는 당시 일반 시민들로만 구성된 캠브리지실험심사위원회(CERB)가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실험실안전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고 시 정부에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정책에 반영하는 ‘실험’을 성공리에 이루어내기도 했다. 이는 21세기 초반에 들어서야 뒤늦게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한국 상황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까.

김명진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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