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2월 2000-02-01   1255

택시비는 내일 줘

나를 두고 하는 얘기다. 그리고 우리 ‘영월회’ 아저씨들을 두고 하는 얘기다. 재작년에 부모님이 안산으로 이사를 가고 난 후부터 2년간 4호선의 아침과 택시의 밤으로 하루에 3∼4시간을 차 안에서 보낸 불쌍한 청춘 얘기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몇 가지 일러두기가 필요하다. 첫째 ‘영월회’는 ‘영등포에서 반월(안산이 시로 승격되기 전에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지역명)을 외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쉽게 말해 영등포에서 안산간 총알택시 영업을 하시는 기사님들의 친목모임이다. 둘째 ‘영파워’는 우리 사무실 가족 중 심야시간이면 영등포를 거쳐 집에 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거의 매일 함께 야근하며 항상 뭉쳐서 퇴근하므로 그 파워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집에 갈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은, ‘영월회’ 아저씨 열여덟분이 모두 우리 집을 알고 계셔서 잠이 들어도 집을 지나칠 염려가 없다는 말이다.

총알택시를 처음 타기 시작할 무렵, 사무실 가족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 과속으로 달리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과, 항상 같은 지역에서 택시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것. 처음엔 나도 항상 긴장하고 택시를 탔다. 안산까지 가는 동안 언제라도 문을 열 수 있도록 손잡이를 잡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얼마 후 안산 가는 총알택시는 ‘영월회’라는 조직(?)으로 묶여 있고, 그 안에는 자체 규율 같은 것이 있어서 동네별 가격과 차 빠지는 순번 등이 있어 누군가 그 룰을 어길 경우 다른 조직원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다 나의 마음이 열리고 아저씨들과 한두마디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 사흘 정도 영등포에 안 나타나면, 아저씨들은 그새 다른 아저씨들에게 ‘나’를 확인하곤 했다. “약수터 아가씨 왔었어?”라고…. 우리 집이 안산시내에서도 택시가 잘 안들어가려는 약수터라는 곳이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영월회 택시 아무나 못탄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점심시간이면 전날 있었던 ‘영월회’ 아저씨들과의 사건과 실화를 이야기하느라 꽃을 피웠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살짝 들려드리자면,

그날도 앞자리에 앉아 아저씨와 수다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시속 1백50km를 넘게 달리고 있던 아저씨께서 갑자기 뒷좌석을 돌아보시는 거다. 4명의, 아니 아저씨까지 5명의 목숨줄을 쥐고 계신 분께서 쉽게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 너무 놀라 덩달아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일? 술이 떡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택시 탈 때 분명 만취상태가 아니었던) 남자손님이 옆자리 손님, 대학의 새내기 같은 앳된 여자손님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학생은 거의 사색이 돼, 무서워 말도 한 마디 못하는 얼굴로 떨고 있는 것이었다.

불과 몇 초 안되는 시간에 ‘이게 지금 성폭력특별법 13조의 공중밀집장소에서의 성추행에 걸리는 건가? 대중교통수단도 명시돼 있으니까 되겠지? 그런데 밀집장소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되는거지? 그게 벌금 3백만원 이던가? 내가 참고인 진술을 해야 할까? 그래. 일단 파출소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아저씨! 파…”를 외치는 순간, 우리 ‘영월회’ 아저씨 먼저 한 마디 하신다. “거 손님! 똑바로 앉으세요.” 좁은 택시 안에서 다소 큰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그 손님 “음야 음야… @$#*&?” 못알아듣는 예의 술취한 소리를 내며 고쳐 앉는다. 나의 심경은 다시 복잡해진다. ‘이 정도에서 참아야 하나? 아니야. 여기서 끝내면 저 아저씨 다른 곳에서 또 그럴거야. 경찰서로 가야 해.’ 바로 “아저씨! 겨엉…”하고 입을 열어보지만 또 다시 내 말을 가로막는 우리 ‘영월회’ 아저씨. “이상한 손님들 때문에 영업을 못한다니까. 나이도 있는 양반이 딸 같은 사람을….” 그제서야 술 취한 척하던 아저씨 한마디 하신다. “내가… (끄억)… 뭘… 잘못…했…(끄억)…다고 그…래…?” 그제까지 참아 온 이성을 한 순간에 놔버린 우리 ‘영월회’ 아저씨, 쐐기를 박는다. “여보! 내가 틀린 말 했소?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어디 여자들이 밤에 택시 타겠소? 당신 딸이 택시 타고 이런 일 당했다고 생각해보쇼. 가만있겠소? 어디 할 짓이 없어서….” 흥분하여 결국 이 한마디 잊지 않는다. “여기서 내려요!” 그 아저씨 결국 집에도 못가 차에서 내렸고, 난 박수를 치고 말았다. 모든 일을 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 아저씨 다신 적어도 ‘영월회’ 택시 타고는 그 짓 못하지 않을까?

외상되는 택시, 봤어요?

바로 다음날 점심시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사무실 가족들은 한마디씩 한다. “네가 어디서 일하는지 아니까 혼날까봐 선수친거지.” 결코 아니다. 그 때까지 ‘영월회’ 아저씨들은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셨다. 우리 ‘영월회’ 아저씨, 훌륭하지요? 다음날 내가 드린 깡통 식혜 하나 받아들고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시던 아저씨….

우리 ‘영월회’ 아저씨 중 한 분은 가족과 함께 초대권도 할인권도 아닌 일반티켓 사서 3·8 여성대회에 오셨다. 객석에 앉아 혹시 내가 못보고 지나칠까 손 흔들어 보이시곤 부인에게 날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얼굴로 인사시키고 연신 웃으신다. 가슴 한 켠이 따뜻하다. 나중에 말씀하시길, 3·8 여성대회에 갔다가 후원금도 5천원 내고 부인에게 책도 사주었다고 그저 지나가는 소리처럼 하시는 아저씨 보고 사람 사는 걸 배운다. 우리 사무실 근처에 손님을 태우고 오시면 전화하신다. “아직 일 안 끝났나? 집에 갈거면 영등포까지 타고 가지?” 이런 날이면 영등포까지 공짜다. 사람 사는 인정을 또 배운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영월회’ 아저씨들에게 뻑 간 사건이 하나 있다. ‘영월회’는 안산 내에서도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을 한 차로 몰아 더 빨리 가게끔 ‘순번제’로 운영 되는데 그 날은 자가용으로 안내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총알택시 타면서 밤마다 위법행위를 하는 나지만 자가용 영업까지 이용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어 머뭇거리니 누가 들을세라 살짝 귀띔하시는 아저씨. 그 자가용을 운전하시는 분이 장애인이란다. 장애인들끼리 만드는 한 신문사의 기자인데, 거기는 월급 없이 일하는 곳이란다. 그래서 아저씨들이 ‘영월회’에 입회비도 없이 받아주고 순번을 주기로 하셨단다. 그리고 그 분의 부인께는 ‘영월회’가 차를 대는 장소에 오뎅과 떡볶이 등을 파는 포장마차 자리를 내주셨단다. 그 흔한 역전 조직(?)에게 신고도 없이 영업할 수 있도록. 아주 늦게 영등포에 도착하면 진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자가용 운전 하시는 분이 한쪽 팔이 없는 장애인인데, 4시경 아주머니가 문을 닫으려면 포장마차의 포장을 말아올려야 한다. 이걸 그 시간에 차를 대고 있는 ‘영월회’ 아저씨들이 매일 하시는 거다. 포장마차 주변의 청소도 잊지 않으시고. 언젠가 그걸 처음 목격한 날, 난 아저씨들 몰래 울었다. 욕 잘하고 난폭한 사람들일거란 총알택시 기사들에 대한 나의 선입관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배인 정으로 집에까지 가는 택시비 없는 날이면 아저씨들에게 전화를 한다. “저 약수턴데요… 택시비가 없어요. 영등포까지 갈 돈도 없어요….” ‘영월회’ 아저씨의 걸작답변, “빨리 오기나 해요.” 영등포까지 타고 온 택시비까지 내주신다. 언젠가는 집에 갈 요량으로 영등포까지 갔다가 영파워 멤버와 술 한잔 하다 너무 늦어 차라리 사무실 가서 자는 게 낫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다 ‘영월회’ 아저씨에게 혼도 났다. “한 시간이라도 집에서 자야 돼. 그래야 내일 또 일을 하지…”하시며 “택시비는 내일 줘”하신다. 이렇게 외상되는 택시, 봤어요?

운동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운동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시민들, 자원봉사하는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쑥스러운 듯 후원금 내는 시민들, 무슨 일을 하는지 들어볼 생각도 없이 애정없는 비판만 하는 사람들, 아주 가끔이지만 ‘여성운동’이라고 하면 욕부터 하는 사람들…. 그런 여러 사람들 중에서 ‘영월회’아저씨들은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하면 웃을까? 최근에 택시비 따져보고 차 사는 게 낫겠다 싶어 요즘은 차를 타고 다니느라 아저씨들을 통 못 만난다. 하지만 오늘 난 영등포로 갈란다. 아저씨들과 새해 인사도 나누고, 오뎅 먹으며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수다 떨러….

황금명륜 한국여성단체연합 기획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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