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2월 2000-02-01   1080

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미군범죄

문득 문득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다. 누가, 언제부터,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아메리카합중국)를 ‘미국’(美國)이라 불렀을까, 하는 의문이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아메리카합중국을 ‘美國’이라고 부르지 않거늘, 심지어 북아메리카의 콧대높은 저들조차 스스로 ‘아메리카합중국’이라 부르는데, 왜 우리만 美國이라고, ‘아름다운 나라’라고 부르는 것일까. 한국전쟁 때 ‘공산도배’에게 빼앗길 뻔한 조국을 대신 지켜줬기 때문에? 보릿고개에 휘청이던 한반도의 ‘불쌍한’ 민중에게 쌀과 분유를 거저 줬기 때문에? 모를 일이다….

새 세기와 새 천년이 열렸다며 모두들 들떠 있던 1월 4일 오전 10시께. 주한미군사령부는 워싱턴의 미 육군 작전센터(AOC)로부터 ‘경기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주한미군 2사단 캠프 에드워드 영내에서 5일 폭탄테러가 발생할 것’이라는 첩보를 전달받았다. 당연히! 미 2사단은 캠프 에드워드의 주한 미군과 군속 3백 명 가운데 폭발물 조사 인력 45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즉각 대피시켰다. 탄약과 유류 등도 함께.

그때 한국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주한미군사령부는 그날 오후 5시10분 한국군 9사단에, 오후 5시30분 한국 합참에 이런 사실을 통보했다. 주민의 안위를 직접 책임져야 할 파주시는 그날 밤 11시50분에야 미군쪽으로부터 “미군은 모든 병력과 장비를 소개했다”는 통보를 받은 뒤 주민 대피를 결정했다. 엄연한 주권국가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그저 뒷북으로 일관할 뿐, 사태를 주도적으로 처리해나가지 못했다.

93년 여름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들어갈 때에도, 주한미군은 가족들에게 방독면을 지급하고 본국으로의 대피를 준비했건만,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몰랐다.

한반도 남쪽에서 ‘미국’, 아니 아메리카합중국은 어떤 존재일까?

여기 한권의 책이 있다. 『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미군범죄』(개마서원 펴냄)라는 이름을 단,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엮은 ‘주한미군범죄백서’가 그것이다. 지난해 10월 말 출간된 이 책은 그 많은 신문과 방송의 출판 담당자에게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책은 온전한 삶을 영위하고 싶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의무방어전’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치외법권 지대’에 살고 있는 주한미군

모두 5백28쪽 분량의 책은 △미군범죄 △미군공여지 △미군기지 환경오염 등 3개 장과 부록으로 구성돼 있다. 관련 규정과 사건, 사례, 통계로 촘촘히 내용을 엮어가며 ‘미군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책을 순서대로 따라가보자. 책에 따르면, 1967~98년 정부 공식통계로 잡힌 미군인 범죄(미군속 포함)는 5만82건이고 범죄에 가담한 미군(미군속 포함)은 5만6천9백4명이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67~87년 미군범죄는 3만9천4백52건인데 이 가운데 한국이 재판권을 행사한 사건은 2백34건으로 전체의 0.59%에 불과하다. 85년부터 90년까지 미군범죄에 대한 한국의 재판권 행사율도 1%를 넘지 못했다(98년 3.9%).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때가 45년인데 통계는 왜 67년 이후에만 있을까. ‘부분적이나마 한국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한미행정협정이 발효된 게 67년이어서, 그 이전에는 정부 차원의 통계가 없다’는 게 정부 관계자의 답변이다. 어쨌거나 미군은 한국에서 사실상 ‘치외법권 지대’에 살고 있다. 한국인의 처지에서 보자면, 주한미군이 있는 곳은 ‘무법지대’인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답을 우리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한미행정협정)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한국의 재판권 행사를 제약하고 있는 협정 제22조의 형사관할권 조항. 책은 이 조항의 핵심을 이렇게 추출한다. △한국에 전속 관할권이 보장되어 있는 사건의 경우에도 미국 쪽이 요청하면 포기한다 △한국정부가 1차적 재판권을 갖고 있는 경우에도 미국이 요청하면 포기한다 △공무수행 중 범죄에 대해서는 한국정부는 행사재판권을 가질 수 없다 △미군 범죄자는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기 전까진 구속하지 못한다 △주한미군은 재판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1심에서 무죄를 받으면 검찰은 항소할 수 없다 △수감중인 미군도 미국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등등.

여의도의 6백여배 넓이의 땅을 무상으로 미군들에게

셀 수도 없이 많은 범죄와 사건들의 사례는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솔직히 속이 울렁거려 쓸 수가 없다. 한가지만 전하고 싶다. 92년 10월 동두천에서 미군 케네스 마클이 당시 미군전용클럽 종업원이던 윤금이씨를 무자비한(!) 방법으로 살해했을 때, 주한미군사령관 로버트 리스카시가 한 말이다. “…마지막으로, 양국간의 긴밀한 유대관계의 일환으로서 미군이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40년 이상 우리의 우방관계를 통하여 실로 수십만 명의 미군들이 대한민국의 방위에 기여하기 위해 그들의 집과 가정을 떠나 이곳에 왔으며….” 도대체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땅에서 자행되는 미군의 추악한 범죄와 오만불손에 대해 우리 모두 ‘나 몰라라’해야 한단 말인가?

주한미군은 대한민국의 영토 7천4백만여 평에 90여 개 기지를 두고 이 땅을 무상으로 쓰고 있다. 넓이로만 보면 여의도의 6백여 배에 이른다. 근거는 한미행정협정 2조와 4조, 5조 등이다. 협정 5조는 미군기지와 시설의 무상사용을 규정하고 있다. 그냥 공짜로 쓰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여파는 심대하다. 도로가 끊기고, 지하철이 돌아가고, 사유지가 강제로 징발된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해안 일대 7백28만 평에 걸쳐 있는 미공군사격장(매향리 폭격장)에선 연간 2백50일에 걸쳐 사격훈련이 벌어진다.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포탄 사이를 누비며 농사짓고 어로사업을 벌인다. 소음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오폭과 불발탄 폭발로 줄잡아 12명의 주민이 아무런 잘못없이 세상을 등졌다. 국책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용산 국립박물관 이전 공사는 미군의 합의거부로 불법공사가 진행중이다. 이 부분도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미군이 기름을 버리든, 매연을 내뿜든 한국인은 잘 알지도 못하고, 설혹 알더라도 미군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한미행정협정 4조는 미군기지 반환 때 원상태로 회복해야 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모든 게 미군 맘대로다.

책을 읽는 동안 분노와 슬픔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생각했다, ‘분노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분노조차 없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끝으로 한가지 제안하고 싶다. 이 책의 영문판을 만들자, 그래서 그 내용을 인터넷에도 올리고, 영문판을 세계 각지에 보내 문제를 제기하자, 그리하여 올 10월 서울에서 열릴 ASEM에서 국제적 문제로 쟁점화하자고…. 이젠 정말, 미군 때문에 망가진 주권과 인권과 문화, 일상을 바로잡아 우리도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훈 『한겨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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