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3월 2000-03-01   741

이기주의와 사회봉사

나는 일요일마다 서울 화계사에서 삼각산쪽으로 등산을 한다. 요즈음 화제의 초점은 자연히 시민운동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이다. 일부 사람들은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떤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무슨 덕을 보려고 그런 시민운동을 하며, 시민운동단체들이 무슨 돈으로 움직이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한번 참여연대 사무실에 와서 젊은 활동가들이 헌신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직접 보고 간 사람의 말은 전혀 달랐다. 큰 회사에 취직하면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능력자들임에도 박봉에 만족하며 헌신적으로 밤낮 없이 일하는 것을 보고 정말 감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잘 납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이익을 기대하니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왜 하겠는가? 이번 낙천낙선운동 지도부 사람들도 그것을 발판으로 정계에 입문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순수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아무리 설명해도 이런 의문들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낙천낙선운동은 주요 정당들이 공천자를 발표함으로써 이제 본격적인 낙선운동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번 일에서 시민운동은 정말 역사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지역감정이나 혈연·학연 등 전근대적 유물에 기대어 국민의 눈을 속여왔던 부패, 기득권 세력들이 이제 주권자들의 단합된 힘 앞에 떨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성과물은 바로 그동안 시민운동단체들의 헌신적 봉사정신과 활동에 대해 대중의 일부나마 그 순수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시민운동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의구심은 너무나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서 당해온 배반과 배신으로 쌓인 불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무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시민운동은 백마디 말보다는 행동으로 대중의 신임을 얻어내는 길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시민운동 정신

그럼 도대체 시민운동의 윤리적 기초는 어디에 있으며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우러나오는 것일까. 서울대 손봉호 교수는 1997년 1월 4일자 기고문에서 ‘합리적 이기주의’가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면서도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인의 이익을 어느 정도 희생시키면서 공동체의 이익을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 이기주의’며, 이것이 시민운동의 윤리적 기반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람을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적인 존재로 보는 한, 왜 시민운동가들이 기꺼이 사회를 위해 그토록 헌신적으로 봉사하려고 하는가를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는 없다. 거기에 아무리 합리성을 강조해도 왜 이기적인 개인이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의 사상사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이 합리적 존재인가 감성적 존재인가에 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인간이 합리적 존재라고 보았던 데카르트(R. Descartes), 록(J. Lock), 홉스(T. Hobbes)에 대하여 흄(D. Hume)과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인간이 감성적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이에 맞섰다. 그러나 종교나 사랑과 같은 인간의 행태를 유심히 관찰해 볼 때,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보다는 감성적 존재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흄과 아담 스미스의 견해를 지지한다. 이성에 의한 이기주의의 극복은 자칫 당위론적 설교에 그쳐 버릴 우려가 없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무관하게 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이기적 존재임을 강조했던 사람은 아담 스미스였다. 그는 이기주의적 인간의 자유로운 사리 추구 행위가 자유시장에 모여지면,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오고, 국민의 부를 증대시키며, 하느님의 거룩한 손에 인도되어 저절로 질서 있는 복된 경제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사상은 기본적으로 그의 그러한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원래 그는 도덕철학 교수로서, 그가 『국부론』에 앞서 저술한 『도덕감성론』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이웃인 동포에 대한 ‘공감 (Sympathy)’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적 존재로 보고 있다. 그의 이론은 록이나 홉스 등의 ‘합리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그들의 개인주의적 견해와 이성주의·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철학 체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아담 스미스가 사회 형성 원리로서의 ‘사회공감’을 사회철학의 중심개념으로 삼았던 것도 그런 논리적 맥락 아래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필자가 이와 같이 아담 스미스의 사회철학을 길게 언급한 이유는, 아무리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일부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정의의 기초가 이른바 ‘합리주의적 이기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봉사와 개인적 이기주의’라는 이질적 대립물의 변증법적 통일 속에서만 사회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변증법적 견해에 의하면 사회적 봉사와 개인적 이익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래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이기주의를 합리주의적으로 억누르는 가운데 사회봉사 정신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동포애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를 위한 봉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충동한다는 견해를 이끌어 내게 된다. 즉 이 견해는 사회정의를 위한 자기 희생적 행위가 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자연적(본능적으로) 귀결되게 되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운동, 어떻게 대중의 신뢰를 받을 것인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야만 한다는 합리적 판단에서 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사회정의를 위한 자발적 참여를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기껏해야 이기주의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선’ 이상의 것으로 되기 어렵다.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 곧 자아의 실현과 자기 자신을 포함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비로소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우리의 운동이 그 철학적 기초를 확립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참여민주주의이다. 그리고 그러한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자기 희생적 봉사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자아실현의 길과 인생의 보람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는 신념에 불타는 사람들이 점차 큰 무리를 형성하여 조직화된다면, 이 사회에 인간의 자유·존엄·평등한 인권의 실현이라는 인류 공통의 절대적 가치가 현실적으로 뿌리내리는 날도 멀지 않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자기 희생적 참여민주주의 운동이 상대주의·허무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고 어떻게 대중의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가에 모든 것의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여민주주의의 핵심 세력들의 자기 희생적 활동으로 극복하여야 할 과제이다.

그와 같은 참여민주주의가 사회의 대세를 이루고, 이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려는 중심 축이 형성되어, 이들이 대중 속에 뿌리내리게 되면, 보다 나은 복지사회와 우리의 숙원인 진정한 민주복지사회와 남북통일의 그 날을 앞당길 수 있는 원동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주종환 참여연대 고문 · 참여사회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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