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2월 2000-02-01   991

낙선운동 민심기행 아이고! 법이고 뭐고 통쾌해 죽겠어요

지난 19일 오전 10시경. 여의도 벌판에 몰아치는 바람이 몹시 차다. 밤새 내린 눈이 국회의사당 둥근 지붕 위에서 녹을 틈도 없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 부패·부실의 대명사로 추락한 정치권. 이를 바라보는 서민들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민심기행의 출발지로 택한 곳은 바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국회의원들은 공공연히 장담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낙선운동이 선풍을 일으켜도 실제 투표소에 들어가면 마음이 달라진다나요. 결국 유권자를 실제로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 아닙니까.” 최근 만난 한 일간지 기자의 말이다. 겉으로는 낙선운동에 대해 호들갑떨지 몰라도 정치권은 내심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그 기자의 말이 진실일까.

낙선운동 경고한 교육위, 한발짝 후퇴

“경실련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한 공문에 대한 답변이 왔습니다. 얼마전 선관위가 경실련의 행위에 대해 위법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들은 공개서한을 통해 사과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경실련이 이런 위법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번 회의에서 우리가 보낸 공개서한이 거부된다면 민형사상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마침 국회 교육위 상임위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 의사일정 제1항으로 채택된 것은 경실련의 ‘부적격의원 공개’의 건. 경실련의 공개사과 요구가 무산된 상황에서 이들이 취할 다음 수순은 ‘감히 헌법기관에게 도전장을 내민 시민단체’에 대한 사법 조치. 하지만 국회 교육위원들은 이날 회의에서 더 이상의 논의를 하지 않고 각당 간사들에게 이 건을 위임했다. 경실련이 공천 부적격 의원을 공개한 뒤 보인 격앙된 모습에서 한발짝 물러선 셈이다.

현재 2000년 총선 시민연대 사무실에는 국회의원들의 소명자료가 쌓여가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양의 소명자료를 내놓은 의원은 박아무 의원. 교육관련 단체들로부터 ‘교육 7적’중의 한명으로 꼽힌 의원이다.

“얼마전에 박 의원님께서 혼자말을 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도대체 나같이 깨끗하게 열심히 의정활동을 한 사람을 그만두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에 당선돼야하는 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어쨌든 낙선운동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회 사람들 대부분이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국민의 80~90%가 찬성하는 데 그 큰 요구를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하지만 낙천리스트 선정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잣대가 마련돼야 합니다. 리스트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선거와 직결되는 문제인만큼 수긍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박의원의 한 측근 얘기다. 국민들이 모두 공감하는 상황에서 낙선운동을 거부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는 의원이 공천 부적격 딱지를 맞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들만의 국회’를 향한 분노

12시 30분. 국회 귀빈식당에선 최열, 박원순씨 등 총선시민연대 인사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자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연신 플래시가 터지고, 기자들은 이회창 총재가 하는 말을 열심히 적고 있다. “선거법 87조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의견을 받아서 전향적으로 밝힐 용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상적으로 국정을 감시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킨다는 기본 방향에 찬성합니다.” 그간 선거법 87조 개정에 회의적이었던 한나라당이 여론에 떠밀려 당초 입장을 번복하는 순간이다. 어쨌든 정치권도 민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국회의사당에서 나와 3번을 타고 곧장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민심을 살피기 위해서다. 버스운전자인 박아무(50)는 기자의 질문에 대뜸 “그거 잘한 일입니다. 힘내십시요”라며 응원을 했다. “신문에 보니까 3천만원을 누가 기부한다고 했다면서요…부패한 사람 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걸 누가 막습니까.” 그는 기자가 내릴 때에도 눈인사를 하면서 큰 목소리로 “열심히 해야 합니다”라며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남대문 시장의 민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곳에서 20년동안 옷장사를 했다는 박아무씨(53). “국회의원이란 직업도 장사 아닙니까. 누가 헛장사 하겠어요. 선거 때 돈을 퍼붓고 임기 내내 본전 뽑기 위해 지그들끼리 물고 뜯기는 전쟁이죠. 진짜 국민을 위한다는 금배지는 눈씻고 찾기도 어려운 실정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이번 선거에는 꼭 투표를 한단다. “시민단체들이 정보를 제공해준다니 이제는 누굴 찍을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남대문 시장에서 등짐을 나르는 곽아무씨(63). 큰 길에서 페인트 깡통으로 불을 지피고 있는 그에게 기자가 말을 건네면서 다가가자 얼른 자리를 내주며 “수고합니다”라며 말문을 꺼냈다. “길거리에서 벌어먹는 사람들이 법이고 뭐고 알 수 있나요. 하지만 자기들은 법 만들고 지키지도 않는데 시민단체들이 하는 일을 위법이라면 몹쓸 사람이지요. 도떼기 시장판으로 변한 국회를 그냥 둘 수는 없는 겁니다. 당장 서명이라도 하지요. 뭐 도와줄 일 없어요?”

“확 쓸어버리자”

일하는 서민들. 길거리에서 오다가다 만난 시민들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정치권에 대해 분노했다. 법을 어겨서라도 낙선운동을 해야 한다는 지지표명도 끊이지 않았다.

“같이 확 쓸어버립시다. 서울시내 길거리를 쓴지도 7~8년 됐지요. 하지만 저것들 다 쓸어버리지 않고서야 내참 성이 안차서….” 시청역 부근에서 만난 한 미화원의 격앙된 목소리다.

“궁뎅이에 곰팡이 슬어가면서 공부해서 오른 자리겠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매일 멱살잡고 싸움질이나하는 국회의원들을 존경할 수 있나요. 이번 기회에 정신차려야 합니다. 불법이요. 그게 무슨 불법입니까. 속이 후련합디다. 이번에도 국민들이 학연 지연 선후배 따지다간 또 당합니다. 결국 국민이 찍는 것 아니겠어요.”

낙선운동에 보내는 시민들의 찬사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만큼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이열치열일까. 부패 정치인들에 대한 낙선운동이 되레 정치 무관심·혐오주의를 상쇄시키고 있었다. 낙선운동을 통해 전해져오는 유권자들의 힘이 오는 총선에서 어느정도 파괴력을 가질 지 주목된다.

김병기(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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