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2월 2000-02-01   461

기분 좋게 이용당하고 싶다

토요일 저녁 8시면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과 함께 아파트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그리고 바로 옆 건물 2층 연희PC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인 아줌마가 웃는다. 우리 부자의 단골자리는 구석에 연결된 두 자리. 앉자마자 우리는 편을 먹고 외계인들을 무찌른다.

“아빠, 1시 방향에 저그가 초반 러시야.”

“민석아, 지원군을 보내줄래?”

가끔은 소리를 지르고 화도 냈다가 집에 돌아가면 자기들끼리만 놀다 왔다고 토라진 아내와 「주말의 명화」를 함께 봐야 한다. 나는 이렇게 토요일을 소시민적인 즐거움으로 지낸다.

나는 어렸을 때도 그렇게 살았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해 주셨고 언제나 우리 가족은 함께 있었다. 나는 남들도 당연히 그렇게 행복하게만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5공 시절 나는 그 행복이 깨지는 것을 경험했다. 권력이라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 가족도 그 대상이었다. 나는 군대로 보내졌고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까지 몸져 누우면서 나는 비로소 우리 사회엔 행복을 빼앗기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이후 나는 소시민적 행복을 만들고 지켜나가고 싶었고, 그래서 택한 것이 PD라는 직업이었다. 어느새 12년이 지났다. 그때의 소망이 어느 정도 행동으로 옮겨졌는지 자신 없지만, 그래도 일하는 동안 많은 동료들도 나와 같은 동기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여름 「시민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같은 동기를 갖고 있는 집단이 또 하나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바로 시민단체의 사람들이다. 두 집단을 모두 좋게 얘기하면 ‘자신의 욕심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앗아가는 사람’들을 응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고, 흔히 얘기하면 자신도 못 돌보면서 남의 행복지키는 일에까지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다. 언론이나 시민단체나 생각에선 비슷하기는 한데 다만 한가지 다르다면 시민단체의 사람들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언론과 시민단체가 갖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항상 내부에 권력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목표가 ‘자리’를 지향하고 있기에 때론 충성을 강변하고 때론 적절한 ‘저항’을 통해 권력에 줄대기를 하는 사람들. 그외에도 작년 취재 중 나는 시민운동의 기반을 뿌리째 갉아먹고 있는 작은 사례들을 수없이 보았다. 물론 시민단체 수가 2만여 개에 이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첫 번째 예는 공무원 모니터를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였다. 조직 내에서 보기에 그는 아주 적극적인 자원활동가로 놓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며칠 본 바에 의하면 그는 하급 공무원들을 달달 볶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내 말 한번이면 공무원들이 발발 떨어요”라던 그의 자랑에 나는 그의 자원활동이 일종의 한풀이로 생각되었다. 하물며 당하는 공무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질까? 혹이나 주변에 그런 취미생활을 가진 사람이 있거든 시민의 이름으로 집으로 돌려보냈으면 한다. 물론 마찬가지의 사람이 언론에도 당연히 있다.

두 번째, 벌써 독선과 거만함을 보이는 단체가 있다.

자기의 주장은 항상 옳고 비판은 참지 못하는 곳. 자신과 자신의 단체만이 최고며 다른 단체는 2류라고 생각하는 그들 중에는 작년 프로그램 제작시, 두 번째로 다룬다 해서 토라져 취재를 거부한 경우가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시민을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단체를 운영하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시민단체도 있다. 그런 곳에선 대개 개인을 위해 조직이 움직이며 참여하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을 귀찮아한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독선이 된다. 이미 겸손함을 잃어버린 몇몇 시민단체. 언론사가 갖고 있는 거만함, 처음부터 그랬을까?

세 번째 유형은 다음과 같다.

취재에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하지만 취재가 있는 날은 사전에 통보해줘야 한다.

말로는 항상 국가와 민족적인 사명의식을 얘기하고 꼭 청와대를 비판한다. 그리고 인터뷰 대상자찾기에 고심해야 한다. 저마다 대표라고 나선다. 그래서 취재를 마친 뒤에는 휴대폰으로 뒷말이 온다. “그 사람 말은 90%가 거짓말이에요, 제가 진짜예요.”

물론 이러한 예는 좋지 않은 몇 사례에 불과하다. 굳이 끄집어냈을 뿐이다. 대부분은 만남 자체가 나에게 신선함을 가져다 주었다. 나의 경우 작년 6개월을 국내외의 시민단체를 취재하며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PD나 기자들의 경우 시민단체와 그런 정도의 접촉빈도는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시민단체에 갖는 인상은 무엇일까.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이는 참여연대나 환경연합의 성공적인 투쟁사례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들리는 추악한 모습들일까? 반대로 시민단체의 사람들이 언론에 대해 갖는 인상도 궁금하다. 권력에 야합하여 언론족쇄 문건을 제작한 정치기자들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볼까, 아니면 나약하고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으로 평가할까.

결국 결론은 간단하다. 서로에 대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외부로 비추어지는 추악한 모습만을 갖고 전체를 일반화해 버리면 한풀이는 되겠지만 애초의 우리의 오지랖 넓은 목표를 달성하기란 틀린 것이다. 일부에 지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결코 전체는 아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최악의 사례를 대표적인 이미지로 일반화해 버리는 것이다.

공동선 향한 서로의 의지 신뢰해야

암스텔담의 그린피스 세계본부. 작년 여름 취재차 방문하게 되었다.

고층빌딩에 세계 각국의 국기들, 그리고 한가운데엔 그린피스의 깃발. 마치 유엔빌딩의 모습을 상상하며 암스텔담 중앙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겨우 명동만한 중심가에서 그린피스 본부찾기란 쉽지 않았다. 모두가 그린피스는 아는데 정작 그린피스 건물은 아는 이가 없었다.

겨우 도착한 5층 건물. 그 절반이 영상자료실이었다. 30분짜리 방송용 테이프가 5천개, 신문이나 잡지용 슬라이드 사진은 셀 수조차 없었다. 모든 자료는 언론사에 무료로 배포된다. 수많은 대중과 자신들을 잇는 연결고리로 그린피스는 언론매체를 적극활용한다.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린피스 본부를 찾을 일이 별로 없다. 간혹 제보전화만 할 뿐.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주장을 방송사나 신문사들이 좋아하는 상징적 영상에 담는다.

핵발전소에서 뛰어내릴 때도, 포경선에 뛰어들 때도 그들은 언제나 카메라와 함께 한다. 극도로 연출된 쇼이지만 언론도 그린피스도, 그리고 시민들도 서로를 이해하고 그 뜻을 받아들인다. 결국은 자연을 보호하자는 일이니까.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단체의 활약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치 무관심 지대였던 N세대들의 참여도 높아졌다 하고 정치인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뉴스도 만들어졌다. 모쪼록 바라는 바는 시민연대가 언론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뉴스거리를 최대한 만들어야 한다. 오디오뿐 아니라 비디오까지. TV에서 잘 다루지 않는 이유는 개혁 의지가 부족하기보다는 영상시대에 오디오만으로는 승부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언론에나 시민단체에나 개인 차이는 있다. 개인적인 호불호의 경험 때문에 사회적으로 유용한 시스템이 무시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위해 중요한 것은 공동선을 향한 서로의 의지를 신뢰하는 일이다.

김창조 KBS PD(뉴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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