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1월 2000-11-01   811

제5회 인권 영화제 미군기지, 매매춘 그리고 체 게바라

당신은 인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쇠창살에 갇혀 지내는 죄수에게, 한 끼 식사와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노숙자에게, 계약만료 기간이 다가오면 재계약을 위해 피땀을 쏟으며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그리고 값싼 비용으로 ‘노예’처럼 일하는 산업연수생에게 ‘인권’은 무엇인가….

수없이 많은 그리고 오랜 투쟁을 통해 획득한 인권은 지금 바로 여기에선 딱딱한 느낌을 준다. 생생하지 않고, 쉽사리 느껴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인권이 일상화되지 않고 뭔가 ‘특이하고 독특한’ 혹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것 때문이다.

여기 영상매체를 들고 나와 인권교육을 하겠다는 곳이 있다. 인간을 이해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 역사를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화여대까지 갈 차비만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제, 제5회 인권영화제가 인권운동사랑방과 이화여대 총학생회 공동주최로 10월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6일 동안 이화여대에서 열린다.

올 영화제는 미국과 관련된 소재들이 많다. 하와이 카호 오라위 주민들과 하와이의 아름다운 풍광, 문화를 동화같이 소개하며 평화를 짓밟는 군기지를 비난하는 「카호 오라위」,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투쟁을 담은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투쟁」, 지난 6월 오키나와에서 열린 인권 평화 국제회의를 통해 일본과 한국의 매향리를 돌아보는 「평화의 시대’」는 미군이 어떻게 평화를 해치는지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때로는 기록으로 알려준다. 이 세 작품을 연속상영한 후 ‘평화의 훼방꾼-미군기지’라는 패널토론을 진행한다.

또한 1931년 미국 스코츠보로 흑인청년 9명이 백인여성을 강간했다는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사건(미국전역에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도화선이 된)을 증언하는 「스코츠보로」, 미국 다코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황폐한 삶을 사는 인디언을 조명하는 「고향」이 소개된다.

또 추방대기자 수용시설의 비인간적인 환경을 담은 「버림받은 사람들」은 다큐멘터리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 여성, 장애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곰곰이 되짚어보아야 할 작품들이다.

미국 독립미디어들이 지난 4월 워싱턴의 IMF 반대투쟁을 취재한 「세계은행 부수기」는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또 IMF 체제 이후 1998년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현대중기산업 노동자들의 450일간의 투쟁을 기록한 「인간의 시간」, 98년 현대자동차에서 정리해고된 144명의 식당아주머니들의 생명을 건 복직투쟁을 담은 「평행선」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뿌리채 뒤흔드는지를 보여준다.

케냐의 언론의 역할을 조명한 「데일리 네이션」, 2차대전 때 미국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인 ‘도날드’가 어떻게 국민을 우민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덕데이터」, 한 영국 상업방송이 유고내전중 날조한 사실을 고발하는 「판단」이 소개된다. 역시 연속상영된 후에 현직기자 등이 참가한 가운데 ‘범죄보도와 인권’이라는 패널토론이 이어진다.

과거청산이라는 문제를 잔잔하게 다루는 영화도 있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시절에 딸을 잃은 어머니가 정보기관에 입양된 손녀를 찾아 나서는 「마리아나의 눈동자」, 방대한 자료화면과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인혁당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4월 9일」도 소개된다.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성노예’로 살아가는 매춘여성들의 삶을 그린 「성매매 거리에서 쓴 꿈에 관한 보고서」, 일본 복지시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은 「바람과 함께 오고 가다」 등 약자의 삶을 조명한 작품도 소개된다.

27일 인권영화제의 개막작은 「체 게바라, 볼리비아 일기」이다. 볼리비아 전투당시 체 게바라가 자신의 빨치산 투쟁을 기록한 ‘볼리비아 일기’를 중심으로 만든 것으로 90년대 다큐멘터리에 한 획을 그은 스위스의 리차드 딘도가 9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카메라는 체 게바라의 시선으로 볼리비아의 산간오지를 누빈다. 체의 동료, 하룻밤 묵은 작은 마을, 그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들을 꼼꼼히 추적해 혁명가 체 게바라를 복원한다. 체가 걸은 그 ‘길’을 조용하고 장중하게 그리고 질식할 정도의 카메라 워킹으로 추적한다. 한국에서 체 게바라 영화는 처음이다. 야외에서 인권영화제 사상 처음으로 35미리로 상영한다. 특히 「체 게바라 : 볼리비아 일기」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봐야 그 여운과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매카시즘과 영화 그리고 인권

이번 영화제 중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작품이 있다.

미국에서 좌익사냥이 극에 달했던 시절 영화인들이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무관하게 만든 영화 「대지의 소금」이다. 유일한 극영화로 당시 대부분의 극장에서 상영을 거부당했지만 뒷날 미국 연방의회 도서관이 선정한 ‘후세에게 물려줄 소장영화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주연 여배우, 백인 보안관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출연했다.

이 영화의 소재는 1950년 뉴멕시코주 실버시티의 아연 광산에서 벌어진 파업이다. 무력탄압과 회유 속에서 지리멸렬해지는 파업을 결국 성공으로 이끈 것은 광부의 아내들이었다. 가난과 성차별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아주머니들이 유치장에 간 뒤 아내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고 빨래를 하면서 남편들은 비로소 아내들이 요구한 ‘수도시설’의 절박함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계급과 성을 아우르는 모든 종류의 평등에 관한 영화다. 한국의 「파업전야」라고 생각하면 된다. 28일 야외에서 상영된다.

또 「대지의 소금」이 만들어진 배경과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처벌에 맞춘 범죄」가 「대지의 소금」에 이어 야외에서 상영된다. 50년대 매카시즘적 분위기를 전달하는 풍부한 자료화면과 「대지의 소금」에서 노동자이자 억압당하는 여성의 역할을 맡았던 출연자들에게 당시의 회고담을 다시 듣는다.

미국사회를 관통한 공산주의에 대한 히스테리, 그 기만의 역사를 만든 가해자와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를 명료하게 가려낸다. 50년대의 영화와 정치의 관계를 흥미있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특히 이번 영화제에선 홍석천 씨의 커밍 아웃과 관련하여 미국 오리건 주의 반동성애 법안 찬반을 둘러싼 공방전을 보여주는 「제9법안 찬반투표」를 특별상영하고,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해 질의 응답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29편. 이 중 극영화 1편과 유니세프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1편을 제외하면 모두 다큐멘터리다. 인권은 머리 속에 관념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의 힘, 진실의 힘 그리고 삶에 녹아들어야 할 인권. 집을 나와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청소년, 볼리비아에서 죽은 체 게바라,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를 찾은 군산 ‘매춘여성’, 여전히 질식할 듯한 편견을 느끼며 사는 동성애자 그리고 폭력이 일상화된 현대중공업 노동자에게 ‘인권’은 살아 있는가?

인권영화제 홈페이지www.sarang bang.or.kr/hrfilm에 가면 영화제 일정, 상영장, 행사 등을 알 수 있다. 전화 : 02-741-5363 / 02-741-2407

심보선 『인권하루소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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