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1월 2000-10-28   1158

[권은정의 파워인터뷰12] 낮은 데로 임하소서 – 박래군

그가 소를 밖에 매어두고 왔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시골 장에 가서 고추를 포대기로 떼다가 트럭에 싣고 팔러 다니는 아저씨라고 해도 아주 잘 어울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외국인들도 와서 함께 하는 국제회의 아셈 준비를 하다가 헐레벌떡 달려온 인권운동가이다. ‘자본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인권포럼’을 준비하다가 왔으며 ‘가능한 한 빨리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인권운동 사랑방의 사무국장이었지만 지금은 실장이 된 그가 말했다.

강등되었어요. 징계를 먹은 거지요. 일을 못하니까요. 넌 사무국장 자격이 없다고 사랑방 성원들이 절 내 쫓고 싶은데, 그래도 일은 해라해서 그렇게 된 거지요.

혹시 서대표와 삐꺽거린 게 있나요?

아니요. 아니 그런데, 대표하고 싸우면 나오나요? 우리 사랑방은 그런 게 아니에요. 서 대표께서 더러 한탄도 할만큼 대표가 그리 많은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아요. 전체회의가 권한을 갖고 있지요. 전체회의는 대표와 사랑방 활동가, 상임활동가들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최고 의사결정기구지요. 활동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지요. 뭐 운영위니 총회니 이런 게 없어요.

그는 현재 인권운동 사랑방의 정책기획실장이다. 사무국장을 내놓고 나니까 일이 적어진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 부담감은 훨씬 적어진 것 같다고 한다. 사무국장이란 게 일은 무지하게 바쁘지만 뭘 했나 싶어서 꼽아보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자리란다.

사실 올 상반기에는 바깥의 연대 일을 하느라 사랑방 사무국장 일을 잘 못했어요. 그래서 정말 내부적으로 징계를 먹은 거지요. 하하하.

강등이건 진급이건 간에 그에게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주위의 권유가 있다. 사랑방에서 <인권운동 연구소>를 준비하고 있는데 서준식 대표는 박래군씨 더러 연구원으로 앉아 공부 좀 하라고 한단다. 즉 다시 말하면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는 이제 운동을 한지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나도 알아요. 밧데리가 다 떨어졌어요, 핸드폰 밧데리까지 떨어졌어요. 하하하.. 그런데 내 성질에 공부를 하겠어요? 엉덩이가 들썩거려서요. 김우중이는 세상이 전부 돈 벌 일로만 보인다고 했지요. 그러면 안 되는데, 결국 그러다가 망하긴 했지만. 난 세상이 전부 인권운동 꺼리로만 차있는 것 같아요.

최근 일어난 일로 전교조 교사 알몸수색부터.. 롯데 얘기도 그렇고, 못해서 속상한 일들로 차 있지요. 그런 일들은 일단 알려지기라도 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일들 ,뭐 빈민들의 얘기가 널려 있어요. 인권운동으로 풀어야 될 일이 너무나 많은데 하지를 못하는 거지요. 이게 우리 운동으로 카바가 안 되는 거지요. 시민운동단체, 풀뿌리 단체들이 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것을 챙기려고 하지 않는 것도 있어요.

자체에서 자기 조직들이 움직인다고 해도 별 영향력도 없고 밑바닥 인생들이 빡빡 기며 해봤자 뭐 악만 쓰는 거지 무슨 영향력이 있어요, 그런데 교수도 붙고 변호사도 붙고 그렇게 해야하는데, 별로 여기 안할려고 그러지요. 길 가다가 장애인들 보면 저걸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데 그런 생각이 든다 말이에요. 이거 아무래도 병인 것 같아요. 병.’

중증이다. 인권중독증. 그는 애초 혁명으로 세상을 뒤집어 보겠다는 야멸 찬 꿈을 키우던 청년이었다. 서울시내를 다니며 ‘그날이 오면’ 접수할 건물까지 찍어놓았던 혁명가였던 것이다. 인권운동을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

경력으로 보면 1988년부터 한 건데 제가 스스로 인권운동 한다는 자의식을 갖고 한 것은 93년부터라고 볼 수 있지요. 88년 그 전 까진 노동운동을 했으니 인권운동이 얼마나 하찮아 보였겠어요. 사실 학생운동 하다가 노동운동까지 하면 십 년 안에 혁명이 일어난다 이런 꿈을 갖고 있잖아요. 그때 운동은 체제 변혁운동이었지요. 그러니 인권운동이니, 소비자 운동이니, 시민운동 이런 게 전부 개량적 운동으로 보였지요. 그리고 그건 나와는 다른 사람, 딴사람들이 하는 일로 생각한 거지요. 그런데 1988년에 제 동생이 분신해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의 동생은 숭실대 국문학과 4학년에 다니던 중 자신의 몸을 불꽃으로 살라버린 박래전 열사이다. 원래 4형제였는데 바로 위의 형이 아주 어릴 적에 죽었다. ‘그래서 둘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두 살 터울인 그와 동생은 아주 사이좋은 형제여서 어릴 적부터 동네사람들은 창자를 맞댄 형제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동생이 분신을 하였으니 그 충격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젊었을 적에는 운동하는 인간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군요. 제가 86년도에 감옥을 갔는데 일년 뒤에 대전 교도소로 이감을 갔지요. 그곳에서 장기수 분들을 만났는데, 저는 그때 2년형을 받았지만 그분들은 최하가 7년이었어요. 그분들과 대화를 많이 나눈 것은 아니지만 큰 느낌을 받았어요. 그분들의 단아한, 경건하기까지 한 생활모습을 보면서 운동하는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요. 지금도 그 느낌이 나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되지요. 동생이 죽고 나서도 그런 힘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거지요. 동생의 죽음이 한 몇 년 동안 믿기지 않았어요. 길을 걸어가면 옆에서 동생이 ‘형’하고 불러요. 뒤돌아보면 씩 하고 웃고 있는 거예요. 환상이고 환청이었어요. 제 동생이 키가 크거든요.’

동생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봐도 분명히 동생 같았다고 한다. 그러게 한동안 헤맸지만 결국 그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졸지에 유가족이 되어 유가족협의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의문사 규명을 위한 농성이 기독교회관에서 있었는데 가서 보니 늙은 어머니들만 동그랗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단다. 자식을 가슴에 묻어, 가슴이 비어버린 그래서 완전히 늙어버린 어머니들. 여성 간사 한 명이 혼자서 하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 있더란다.

실무 일을 도와야겠더라구요. 그 어머니들의 딱한 사정 때문에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발목이 잡혀 93년까지 하게 된 건데 그 운동이란 전체 운동 중에서 통일 전선의 한 부분으로, 작은 부분이죠. 제가 뭐 큰 일 할 성격도, 그릇도 아니어서요. 관념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과격한 면이 있지만…하하하……….작은 일로 기여하자 뭐 그런 생각이었지요. 굳이 93년부터 인권운동을 했다고 하는 이유는, 그 해에 비엔나 세계인권대회가 열렸어요. 유가족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멋모르고 그 회의에 참가하게 된 건데 가서 보니 여러 가지로 충격적이었어요. 동성애자들이 시위를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아동의 권리니 뭐 이런 게 있는 거예요. 한국사회에서는 인권운동하면 양심수였거든요. 더 나가서 노동자 인권. 그런데, 인권이란 범주가 상당히 넓은 거더라구요, 이런 것도 인권이라고 할 수 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충격을 먹었지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를 인권운동에 더욱 매진하게 만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연세대 선배인 문국진씨가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의 부인이 그 일을 들고 그를 찾아온 것이다. 어디가도 단체들이 흔쾌히 받아준 게 아니어서 유가협의 박래군을 찾아온 거였다.

비엔나에 다녀와서 생각이 많아진 저는 고문문제도 인권으로 풀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지요. 문국진씨 활동하면서 제가 인권운동을 본격적으로 한 거 같아요. 인권운동 사랑방일을 같이했지만 93년 8월에 정식 성원이 된 거지요. 여러 가지로 보면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아직 인권운동이 뭔지 모르겠어요. 인권이란 범주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그런 공부는 안 되어 있는 거지요. 현장에서 활동하는 게 주가 되거든요, 고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인권은 사기치는 거 같아요. 왜냐하면 말이죠.

그런데 정말 사기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기친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 법이다. 진짜 사기꾼과 가짜 사기꾼이 이점에서 구별되는 것이다. 바쁘다고 해놓고서 그는 인권강의를 시작한다. 바쁘니 말을 빨리 하는 걸로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요량인지 말도 빨라진다. 이러니 어떻게 스톱을 할건가. 바로 옆자리까지 손님들이 들어앉은 바람에 내 녹음기는 주위 여러 목소리를 모두 녹음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저걸 어떻게 가려듣나 하는 걱정을 핑계로 강의를 흘려듣고 있었다.

(에, 또) 인권의 이념은 자유와 평등인데, 아 물론 여러 가치들이 있지요. 그 중에서 대표적인 개념을 자유와 평등이라고 한단 말이에요……인권선언도 있고 국제 인권규약도 있고 한데 …이게 최소기준이란 말이에요.(잘 들으세요) 최대기준이 아니라 최소기준이라는 거죠. 우리는 이것을 준수하라고 하는데 과연 이 사회, 이 체제에서 이게 가능하냐 하는 거죠. 불가능한 것을 가지고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사기다 이거죠.

실제 자본주의사회가 계급사회고 불평등 사회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진보적 인권운동을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에서의 인권운동이 뭐냐하면 양심수나 정치범들은 중심으로 해왔기 때문에 역사성은 있지요. 7,80년대 이들이 탄압 받고 해왔기 때문에 시급한 것이었지요. 그들이 민중들을 위해 일한 거였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풀어나간 것은 맞았던 거죠.

그럼 감옥에서 일반재소자들과 양심수들의 차이를 보며 알 수 있어요. 감옥에서 특권층이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조폭이고 다른 하나가 양심수란 말이에요.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배려가 되요. 일반재소자들을 같은 경우 체포, 재판 그 과정에서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하는데 이런 감옥 안의 재소자들에 대해서 인권단체들이 말을 안 한단 말이에요. 교정사목활동이 있지만 이들의 권리신장을 위해서는 아니란 말이지요.

한국의 인권은 지나치게 지식인 중심이고 신사적이란 거지요. 인권운동은 지저분해지고 낮아져야 해요. 밑바닥으로 가야한다는 거지요. 저도 사실은 아직 못 가고 있어요. 인권운동이 민중 속으로 가야한다는 거, 일반민중이 찾을 수 있는 운동, 그런 게 되어야한다는 거지요.

그가 올해 초 모 신문에 쓴 글 중에 ‘ 이름 있는 투쟁가보다 수많은 무명의 피해자들의 시련이 더욱 혹독하다’는 글귀가 있다. 그는 인권운동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을 적시고 구석쟁이 아무도 눈 돌리지 않는 곳에도 일일이 쓰다듬고 지나가는 물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연세대 국문과 출신이다. 나는 국문과 출신만 보면 ‘시를 잘 쓰시겠군요?’ 라고 묻는다. 물론 하나같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는데 그러면 영문과 나왔다고 하면 왜 영어 잘 하시겠다고 하는가? 그는 시는 아니지만 소설을 좀 쓴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경기도 화성이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는 수원으로 유학 나와서 다녔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 타의 모범이 되는 완전한 범생이었는데 수원에 나와 자취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문제소설을 두루 읽으면서 울퉁불퉁한 세상에 대해 분노의 분석을 해보고 술 담배를 하면서 세상에 고함도 질러댔다. 이런 고등학생이 대학에 들어갔으니 ‘못된 선배’들이 그냥 둘 리가 있었겠는가. 학년말부터 ‘선배’의 꾐에 빠져 운동을 하게 되었다. 좀 늦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고민의 해답을 사회과학 공부를 하는 동안 얻을 수 있었다. 그 시절 그의 별명은 ‘스펀지’였다. 읽는 즉시, 듣는 즉시 모든 것을 그는 빨아들였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애초 대학에 입학할 무렵부터 창작욕에 불타고 있었던 그의 꿈은 어쩌면 ‘신춘문예당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1학년말에 이미 대학 문학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단편소설의 제목은 ‘땅강아지’. 농민소설로 농촌에 사는 젊은이들의 답답증을 리얼하게 그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흐뭇할 만큼 그 작품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앞으로 소설을 쓰실 계획이 있으시겠군요?

언제나 마음은 있는데 시간이 나야 말이지요. 전 주위사람들에게 난 언젠가 소설을 쓸것이라고 외고 다녀요. 일단 시간이 나면 에로소설부터 쓸 겁니다. 그래서 대박을 터뜨려서 인권운동 사랑방을 경제적으로 탄탄하게 올려놓고, 내 노후준비도 해 놓아야죠…하하하

박래군이 쓴 에로소설 1, 2, 3탄 기대하시라.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박래군씨가 정말 끝내주는 에로물을 쓸지 누가 알겠는가!

최근 읽은 작품으로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좋았어요. 요즘 소설은 가벼워져도 너무 가벼워졌어요. 정신도 없이 말이죠. 원칙도 없고. 80년대의 정신을 상실해 버렸어요. 개판이 되어 버린 거죠. 좋은 작품이 안나오니 사실 내가 뜨기에는 유리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거죠?! 이때 작품다운 작품을 써서 바로 ! 하하…,전 소설은 리얼리즘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빡빡 기는 밑바닥 인생에 대해서 쓸 겁니다. 다른 것은 배부른 소리다, 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요. 하하하…

그는 정말 소설을 쓸 것이다. 내일 일어나서 세수를 할 것이다라는 말처럼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그는 소설에 대해 말한다. 그에게 아마 소설은 또 다른 자신을 지키는 최후의 망루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시간과 지금의 현실과 앞으로의 꿈을 담은 그의 얘기가 우리 앞에 곧 나타날 것이다.

박래군이 시민활동에 대해 특히 참여연대에 대해 해줄 얘기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참여연대출범당시 연대의 한 부분이었던 인권운동 사랑방은 겨우 6개월의 동거를 한 다음 이혼을 했다. 요즘 그의 눈에 비친 참여연대는 어떤가?

참여연대 걱정돼요.

어떤 면에서 ?

여러 가지 면에서. 하하하…

일만 회원 돌파했다는데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회비가 늘어나잖아요.

아, 그건 중요하지요. 하하하 ….걱정되는 것은 다른 것과 똑같이 성장주의 모델로 가는 것 같아요. 성장주의 모델은 한계가 있는 거지요. 이건 양을 계속 불려가지 않으면 유지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돼요. 작아져야 하는데, 참여연대는 너무 커버렸어요. 권력화 되어가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참여연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는 데가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 참여연대로 갈려고 하는 거지요. 다른 단체로 안가고 말이지요. 참여연대가 말하면 언론도 받아주고 정부나 국회의원도 말 들어주고 그렇잖아요.

어떤 단체가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긍정적인 것 아닌가요?

그럼요. 그렇지요, 그런데 비대화되고 독점적이 된다는 점이 우려된다는 것이지요. 독점화, 권력화 되는 것은 위험하지요. 제가 독점이라고 말하는 것 중에 특히 인적 재원에 관한 것이죠. 너무 많은 전문가들이 결합되어 있어요. 교수들, 변호사들, 우리 나라에서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참여연대에 있는 거예요.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난 사람들한테 말해요. ‘참여연대 그만 가라. 거기 사람 많다. 다른 단체에서 얼마나 필요로 하는데 그런 쪽으로 신경 좀 써달라’ 그러죠. 다른 단체는 주머니 털어서 활동비를 충당하는데 참여연대는 사업을 잘해서 그런지 그렇지 않잖아요. 만 명을 넘어선 것이 자랑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단체가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체를 유지시킬 수 있는 인력과 재원이 있어야 하는데 회비가 안 들어오면 활동비 못 주고 그러면 이들이 떨어지겠지요. 그러면 활동에 펑크가 나버리죠. 그러니 구조는 커지면 안된다는 거지요. . 우리도 너무 커진 감이 있어요. 작아진다고 영향력이 줄어드는 게 아니지요. 참여연대는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하겠다, 뭐,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인지. 다른 단체들이 그늘에 가려 기를 못 펴고 있어요. 그 사람들도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지요. 참여연대는 이것저것 하는 단체가 아니라, 이것을 하는 단체로 고정되었으면 해요. 그게 다른 단체와 함께 사는 방법이지요

<해리포터>가 전지구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그 영국작가는 영국여왕보다 더 부자가 되었고 온 세계 어린이들은 <해리포터> 다음 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게 되었다. 이 현상에 대해 작가의 고향 한 출판업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해리포터>가 좋은 책이란 것은 알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유도 안다. 그러나 <해리포터>에 가려 얼마나 좋은 책들이 그냥 사장되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한다.’

그의 참여연대론은 계속된다.

참여연대가 과연 진보적 색채를 가져갈 수 있겠느냐 하는 거지요. 가령 경제민주화 같은 경우 그게 뭐 하자는 것인지, 참여연대가 자랑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결국 자본주의 효율성을 높이기 운동 아닌가요? 그런 운동을 해야하는 것인지, 체제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거든요.

인권운동 사랑방은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요?

다른 단체 활동가들이 들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재정부분도 활동가들이 모두 책임져야한다, 생활인으로 활동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지요. 단체의 직원이 되는 게 아니고, 단체에서 주는 활동비로 사는 게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거의 온종일을 인권운동으로 보내는데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아, 찾아보면 일은 있지요. 활동가의 자생력을 말한 것이지요. 활동을 하려면 끈질긴 생명력을 가져야 해요. 3, 4십대 운동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70대까지 살아 남으려면 끈질긴 생명력을 가져야 하는 거지요. 우리는 구성원 수를 정해두지 않아요. 누구든지 인권운동 하겠다 하면 같이 하자는 주의죠. 돈도 들어오는 수입을 다함께 나눠서 쓰는 것이고. 우리 기본급이 35만원이에요. 난 좀 형편이 다르지만, 미혼인 경우는 적게 쓰고 살더라구요. 풍족하게 못사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남편을 둔 아내라면 누구나 두 손 걷어 부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인은 맞벌이로 남편의 활동을 전폭 지원 해주고 있다. 이들은 내년 삼월이면 결혼 십주년을 맞이하는 베테랑 부부이다. 부인은 유가협 시절 대학 졸업한 후 ‘멋모르고’ 운동권 선배를 선택한 불만을 요즘에사 한 두 마디 꺼낸다고 하는데, 듣기만 해도 사이좋은 부부 같았다. 그는 자신이 여섯 살, 여덟 살인 두 딸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아빠라고 자랑한다. 이유는’공부하라’는 소리를 안 하기 때문이라나.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점수를 스스로 매겨보자면?

100점 만점에 50점 정도는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는 운동경력 20년의 활동가이다. 일해온 것 보더라도 요즘 뜨는 ‘386 세대’로 손색이 없을텐데?

전 386이란 말을 싫어해요. 광주세대라고 해요. 386은 무슨, 난 586쓰고 있는데… 그 사람들 변절한 것이고 전향한 것이에요. 변절을 합리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런저런 구실을 갖다 붙인 거죠. 80년대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 좋다 이거죠. 그렇다면 그것을 현실정치에서 어떻게 구현시키는 것으로 해야할텐데 오직 입신하는 것으로만 이용하니 싫어지지요. 운동할 때 그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니고 그 친구들도 그때는 순수했던 것 같은데….나이가 뭔지… 전 그 사람들이 386이란 말을 쓰려면 그 시대 정신을 계승시켜 나갈 때만 그렇게 쓸 수 있다고 봐요. 그렇게 못할 거면 그런 말 쓰지 말라는 거지요.. 출세지향적이 되건 그것은 그들의 마음인데 운동을 팔아먹지 말라는 얘기지요. ‘

그는 요즘 주말이면 시골의 부모님 댁으로 간다. 화성 제부도 가는 입구에 있는 고향마을에서 부모님은 포도 농사를 짓고 계신다. 연로하신데다가 아버지는 병으로 오래 전 두 다리를 잃으셔서 목발에 의지하시고 어머니는 얼마 전에 뇌수술을 하셨다. 올해 포도 농사는 좋았지만 값이 작년 반밖에 안 되는 바람에 모든 농민들의 운명인 ‘되풀이되는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중에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주말에는 포도를 위해 일한다. 그의 손안에 있는 사람과 포도 알은 모두 귀한 존재로 대우받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농사가 내 체질이다 싶어요. 하고싶은 게 많아서 참…, 농사도 짓고 싶고 인권운동도 하고 싶고 소설도 쓰고 싶고, 나이 마흔이면 불혹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공자가 말씀을 잘못하신 것 같아요. 하하하…..

그는 자신이 노숙자 틈에 들어가면 노숙자 처럼 보이고 노동자들 속에서는 노동자로 보이고 어디에서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하고 어울리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지식인들하고는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하하하

그는 웃음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소탈하고 격의 없는 사람이라고들 하는가 보다. 그러나 그는 매우 강하고 다부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인권운동은 그의 꿈을 위한 ‘과학적 상상력’의 한 계단이다.

글쓴이 : 권은정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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