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0월 2000-10-01   991

꽃을 든 남자 인간 김성수

※이번 호 ‘손석희가 만난 사람’은 필자 사정으로 쉽니다. 대신 권은정 본지 편집위원이 성공회대 총장 김성수 주교를 만났습니다. 성직자라는 권위보다 인간적 따스함이 느껴지는 김 주교의 훈훈한 인생살이를 소개합니다.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오는 날 아침이었다. 밀리는 버스에 시달린 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다시 학교까지는 몇 분을 걸어야 했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우산살이 꺾이고,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모처럼 입은 정장은 젖어가고, 스타킹은 얼룩이 졌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처럼 설상가상으로, 오느라고 두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시간에도 늦었다. 젖은 옷만큼이나 구겨진 내 표정이 7층 총장실에 닿기 전에 펴질 것인가.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성공회대학교 총장인 김성수 주교께서 ‘우중에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하자 솜사탕을 먹은 기분이 되었다. 그처럼 핸섬한 젠틀맨이 환대를 해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장미꽃을 건네주며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해요’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2학기 개강을 하던 날, 이 대학 학생들은 모두 기분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인디언 핑크 셔츠를 입은 멋쟁이 총장이 교문에 서서 장미송이를 나눠준 것이다.

“학생들과 총장 간의 간격이 너무 먼 것 같아서 학생들에게 잘 지내보자고 미리 인사를 한 거지요. ‘내가 총장이야, 재밌게 지내자’ 하면서 인사를 했거든요. 첫날에는 무표정하던 아이들이 차차 말도 건네고, 남학생들은 왜 여학생만 주세요, 저희도 주세요 하고, 어떤 여학생은 전 어제 못 받았어요, 하면서 인사를 하는 거야. 그러니 좀 가까워진 것 같았지요. 예수님은 어디 안 다닌 데가 없잖아요. 내가 학교 구석구석 다니면서 아이들한테, 내 고민은 니가 들어주고 니 고민은 내가 받아주고 그런 사이가 되자는 뜻으로 한 것이지요.”

그가 총장직을 맡은 지 80일이 지났다. 그 전 총장인 이재정 신부가 정계로 입문하는 바람에 공석이 된 자리에 이사회에서 김성수 주교를 임명한 것이다.

“내가 총장으로 오는 것을 극구 사양했었지요. 어렸을 적에는 공부를 잘했는데 커가면서 학문에 젬병이었거든요. 그래서 미가엘 신학교만 1차로 붙었고, 나머지는 첫번째로 붙은 적이 없었어요. 공부와는 담 쌓은 사람이었는데, 대학교라는 게 학문을 하는 곳인데 무식한 놈이 대학교 총장이라면 말이 안되지. 내가 여길 와서 이걸 끌고 나갈 힘이 도저히 안될 것 같고 그래서 사양을 했는데, 할 수 없이 이사회에서 결정해서 온 거지요. 성공회대학과 대한성공회를 위해 내가 봉사할 일이라는 권유에 넘어간 거지.”

학생들에게 나눠준 장미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아마 대학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그 자신의 교육방침이나 철학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구체적으로 어떤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것인가?

“큰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해야 할 일이 사람을 키우는 일이니 참 중요한 일이에요. 우리 대학이 열림, 나눔, 섬김을 모토로 하여 열린 인간을 지향하는 학교이니 무엇보다 인간 간의 소통이 중요하지요. 한 사람의 특별한 지도자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열 사람을 키워내야지요. 그리고 작고 비천한 것이라도 존중하고 섬길 줄 아는 인격이야말로 참된 학문의 실체이지요. 학생들이 우리 대학의 교수님들을 보고 온다는 게 참 자랑스럽고 흐뭇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특성을 더욱 잘 살려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까지 다녀본 여러 기관의 책임자들의 방이나 대학 총장실이라면 얼핏 연상되는 것과 달리 그의 집무실은 아늑하고 소박했다. 비서실로 통하는 문과 복도로 통하는 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전망 좋은 창 밖으로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평안한 실내에서 바라보는 빗줄기는 조금 전의 빗줄기와 정말 달라 보였다. 오전 열시 반이라는 시간은 서류결재에는 좋은 시간일지 몰라도 인터뷰하기에는 그리 적당하지 않다는 내 생각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총장이 된 후 친구들이 그에게 물었단다.

“야, 임마, 너 뭐라고 불러야 되니? 총장이라고 불러주랴?”

“야, 이 자식아, 주교라고 불러, 그게 편해. 총장은, 임마, 4년 하면 끝나는 거야, 총장은 무슨 (얼어죽을)… 주교 너 뭐 아무나 되는 줄 알아.”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보니, 학교를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뭐가 빠진 것 같고, 그렇다고 ‘총장 김성수 주교’ 하면 너무 긴 것 같고…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보다 더 복잡하다.

“여러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내가 헷갈리는 거예요. 교인들하고 만날 때에는 그냥 주교로만 대하면 되는데, 대학교에서는 총장으로 만나야 하니, 이게 헷갈리는 거지요. 학생들하고 만나서 얘기할 때 나도 모르게 주교의 자리로 오는 거예요, 예화를 들어도 하느님 얘기를 하고 말이지. 교회 아이들은 이렇지 않은데 너흰 왜 이러냐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고, 고정관념이지요. 그렇다고 학생들한테 교회 아이들처럼 너무 공손하게 대하길 기대할 수도 없고. 내가 자랄 적에는 여학생, 남학생이 이만큼은 떨어져 앉는데, 요즘 아이들은 안 그러지. 그리고 내가 지나가도 담배 빠꼼빠꼼 피우지. 주교로 있을 적에는 야, 주교님 오신다, 하면서 어른들이건 학생들이건 간에 담배를 비벼 끄는데, 학생들이 야, 총장 온다, 하면서 담배를 끄느냐, 이 말이지. 내가 칠십 넘었다고, 총장이라고, 학생더러 이눔 저눔, 이 자식아 하면 교수님들이 큰일난다고 주의를 주시는데,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또 주교로서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아이구, 요즘은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아주 헷갈려요.”

즉, 다시 말하자면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내가 누구냐? 총장이냐 주교냐? 물론 둘다인데 그러면 행동을 할 때 어떤 기준을 미리 들이밀어야 하는가. 이런 경우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운다고 했나?

그뿐이랴, 그는 성 베드로 학원의 원장을 20년 넘게 맡아왔다. 그러니 사랑 나누기에도 성공회대학은 그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가 오랫동안 교장을 맡아온 성 베드로 학교 어느 해 졸업식 날, 몇몇 학생이 식장에 오지 않았단다. 졸업을 하면 아무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집으로 가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졸업식에 안 온 것이다. 그는 가족회의를 열어 부친이 남겨주신 강화군의 땅 2,000평을 내놓고 거기에 학교를 짓기로 했다. 당시 복지부 장관인 손학규 씨가 ‘인간 김성수’가 하는 일은 무조건 도와줄 일이라며 거금 20억 원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마을’이 지어졌고, 정원 30명이 3년간 코스로 기숙사생활을 하며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

그는 총장 취임 직전까지 ‘우리마을’ 원장을 맡았고, 아직 명예원장으로 있다. 정신지체아들인 원생들은 지난 번 총장 취임식 때 초대받아 식장의 한 자리를 빛나게 해주었다.

“그 아이들은 정확하게 이게 뭐다 하는 감각은 없어도, 강화에서 버스 타고 오느라 즐거웠죠. 그리고 여기 와서 많은 사람 틈에 끼어 있으면서 나도 뭔가 참여하고 있으니, 나도 인간이 되는 건가 보다 하는 잠재의식을 가지는 거죠. 그걸 보는 주위 사람들도 이렇게 보니 이 아이들도 우리와 별다른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요. 조금 산만한 것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총장 취임식 못한 것도 아니고, 우리는 반드시 함께 가고 함께 나누고 그래야 하는 거예요. 교회행사나 다른 데서도 이런 사람들을 불러다가 같이 시간을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 아이들을 부른 거죠. 그 아이들로부터 나 자신도 배우는 게 많아요, 그 아이들은 욕심이 없어요. 그게 병이 되긴 하지만, 하하하… 서로 양보하고, 서로 앞서서 가라 하고, 우린 못하는 거죠. 걔네들만 할 수 있는 거죠. 특별한 하느님의 은사예요.”

지체장애인인 그들에게는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우리는 그 아이들한테서 좋은 인간성을 배우니 서로서로 필요한 존재가 된다. 이런 엄청난 더불어 사는 삶의 비결을 그는 아무런 부담 없이 얘기한다. 그렇지만 대학을 운영하는 것은 좀 부담이 되는 것 같다.

“대학을 운영하자면 재단도 넉넉해야 하는데, 내가 송자 총장처럼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도 많이 끌어올 재주도 없고… ‘우리마을’ 좀 도와주세요 하면 도움 받기가 참 좋은데 대학 발전기금 좀 내놓으시지요, 하면 왜 꼭 성공회 대학이냐, 다른 대학도 많은데, 하지요, 나쁜 사람들이에요. 하하하….”

성공회의 수장으로서 종단을 맡아오던 그에게 이 사회는 황야가 아닐까. 무한 경쟁시대에 등 떠밀려 나온 그. 더구나 그는 이런 경쟁사회에 면역이 안 되어 있는 듯하다.

“난 이재정 총장이 정말 미워요. 아니 왜, 까마귀, 으이쿠(이런 말을 공식적으로 해도 되냐는 듯 장난스레 웃는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더 많이 하고 싶은데 참는 듯 했다.) 노는 곳에 괜히 가설랑은, 그 사람이 성공회대학을 무에서 유로 창출해 놓은 사람 아니오, 그냥 이 자리에서, 정치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건 이게 잘못되었소, 하면 훨씬 더 좋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 이 자리에 오게 만들었으니 밉지.”

사람들이 식사대접 한다고 할 때마다 안 먹겠다고 실랑이 벌일 수는 없지만 밥 사주는 대신 그 액수만큼 수표로 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단다.

“아, 내가 대학에 쓰든, 베드로 학교에 쓰든 그럴 수 있는데 말이죠. 식사는 산다면서 그런 돈은 안 줘요. 꼭 써야 할 때 돈을 쓸 줄 알았으면 좋겠는데, 자동차도 그래, 윗사람이 타는 기준에 따라서 아래로 죽 내려간다 하니, 윗사람이 중간 걸로 타면 그 아래로 이렇게 기준이 정해지지 않겠어요. 내가 우리도 밴 같은 걸로 하자고 하니 ‘총장회의 가면 그 차는 들여보내지도 않을 거’라고 말리는군요. 허 참, 경제적으로는 잘살게 한 게 고맙긴 하지만 군사정부가 너무 푼 거예요. 소비가 미덕이라니, 어째 그래요. 우리가 가진 게 뭐 있다고? 돈 높이에 따라 도덕을 재는 세상이니….”

평생 성직자로 살아오면서 다른 인간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내왔겠지만 그래도 미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일까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고, 있지, 너무 뺀질뺀질한 사람들이 미워. 너무 제 앞가림만 하는 사람들, 자기만 아는 사람,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 눈도 안 돌리고 말이야,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외국에 나가 나라 망신 시키는 사람들, 주체성 없이, 예의 없이 한국 망신시키는 게 정말 밉지.”

세태가 변하니 사람들은 따라 변하고, 기준이나 잣대도 전과 같을 순 없다. 그래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불변의 가치가 있겠지요? 어떤 거지요?

“당연히 있지요. 우리 대학의 모토인 열림, 나눔, 섬김으로 인간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정부터 시작해서 부모가 부모답고 자식이 자식답게 되어야지요. 가정으로부터 시작하고 회복되지 않으면 안 돼요. 내가 주교 시절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삐뚜루 나가니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더군. 우리 애가 나더러 ‘우리 집이 뭐야, 사람들이 맨날 많아, 여관이에요?’ 내가 하루종일 아버지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눌 수 있어요? 그러더군. 내가 영국사람하고 결혼을 했으니 아이들이 얼굴 생김이 좀 다를 거 아니에요. 친구들이 끼고 못되게 굴려고 하고, 그런 게 모여 이 눔이 삐뚤게 나가기 시작하는데, 어이구 이건 뭐, 한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내가 잘못했다 싶더라구요. 말 없는 교육이 필요한 거지, 성직자인 아버지가 밖과 안에서 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더라구, 설교 때는 서로 사랑하라 하지만 안에서야 왜 이렇게 못하냐고 소리 지르게 되더라구요. 그렇지 않겠어요? 나도 말만 늘었지. 행동으로 옮기는 게 참 힘들지.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란 힘드는 거예요.”

며칠 전 추석날 성공회대학에서 노숙자를 위한 모임이 열렸다. 고향은커녕 집에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제사상도 차려놓았단다. “서울시에서 관할하고 우리 대학이 책임을 지고 하는 것인데 한 200명이 왔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시민운동이란 게 뭐겠어요, 길거리에 노숙자들이나 구걸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버려져 있는 걸 보고 정부한테 뭐 하느냐고 따질 줄 알아야 해요. 세금 거둬서 뭐 하느냐고 할 줄 알아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린 그거 아직 못 하지요. 국회의원 선거 때 되면 가가호호 찾아다니고 아픈 사람 들여다보고 하다가도 배지만 달면 누가 찾아가나. 언젠가 그런 적이 있어요. 추석 때 베드로 학교에 OOO 의원이 다녀갔나 물어봤더니 안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만났을 때, 좀 오지 그랬냐고 했더니, ‘아 날 불러줘야 가지요’ 하는 거야. 이런 빌어먹을 놈이 어딨어? 그럼 선거 때엔 누가 불러서 찾아오나?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국회의원 자격도 따져야 하지만 소외된 사람들과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같아질 수 있나 그런 운동도 해야지요. 민주국가에서 모두 인권이 있는데 어느 인권은 높고 어느 인권은 낮나, 그러면 안되지요.”

많은 이들이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본인이 알고 계시는지요? 최근에 어느 여성단체인지, 잡지인지에서 ‘만나고 싶은 99명의 남자’에 그가 지목되었단다. (안목 높은 여성들이다)

“잘 몰라서 그렇지요. 아마 우리 부모님께서 날 멋있게 이 세상에 내주셔서 그런 것이지요. 내가 한 건 없지요. 하하하… 인상도 좋고 바보같이 맨날 웃으니 그렇게 보였나보죠.”

그의 말대로 부모 덕분에 잘생겼다 하더라도 그걸 갈고 닦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다. 내면을 다스리는 일은 특히 그러하다. 매일 밤 발바닥으로 손바닥으로 청동거울을 들여다보며 속을 갈고 닦는 것일까? 비결이 있을까?

“선천적으로 그런 게 있어야 된다고 봐요. 배제고등학교 때 아이스 하키 운동하다가 병에 걸린 거예요. 폐결핵을 십여 년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그때 정신적으로 영글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럴 적에도 아이들이 참 좋아서 덥석 안아주곤 했는데 아무리 친척이라도 그건 싫지, 아이들을 뺏어가 버리면 서운하긴 하지만 난 환자니까, 하면서 잘 삭였지요. 그런 걸 남들보다 일찍 겪은 게 아마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청춘시기에 병을 앓으며, 무시도 당해보고 병자라고 손가락질도 받아보고 그런 곡절이 있었으니 오늘 이 길에 있는 거지요. 남에게 뭐든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예수님은 서른까지 목수 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어요. 난 그래도 세끼 밥 잘 먹고 살았으니 그것도 미안한 거지.”

나이는 가장 객관적인 것이다. 나이는 그 사람 개인의 것일 수 없다. 내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에(혹은 어렸을 적에) 나보다 나이 많은 이가 ‘당신의 젊음이 부럽다’라는 말을 할 때에도 난 기쁘지 않았고, 기분 좋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지금도 난 젊음이라는 단어에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가 앉았던 자리에 내가 오늘 지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이를 넘어선 인간을 부러워한다. ‘총장 김성수 주교’는 그런 사람이다. 굳이 ‘마흔 넘어 자신의 얼굴을 책임지라’는 진부한 말을 인용해야 한다면, 그는 확실히 책임을 잘 진 사람이다. 온화하고 중용적인 덕과 품성을 가진 사람이 ‘사람 키우는 큰 일’에 발을 내디딘 것은 기대할 만한 일이다. 흔히 사람을 가르고 싶어하는 이데올로기나 사상적 편향도 ‘김성수’를 가르진 못할 것 같다. 마음이 넓고 따스한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위에 내리는 비는 무지개를 몰고 올 것 같았다.

권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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