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0월 2000-10-01   1095

미국의 공공분쟁 해결제도, 그리고 한국 시민단체의 역할

공공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해결방법은 협상과 중재다. 협상은 분쟁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며 상생적인 해결책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미국에서도 당사자간 협상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많다. 서로 감정이 격화돼 만나면 문제가 더 꼬이기 십상이다. 특히 환경-개발문제나 공공정책을 둘러싼 공공분쟁의 경우 사안이 크고 복잡한데다 관련 당사자 수도 많아 협상으로는 좀처럼 해결되기가 힘들다.

이런 경우에 유효한 것이 중재(Mediation)다. 공공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정부에서는 대개 외부의 전문중재인(Mediator)에게 중재를 의뢰한다. 중재란 중립적인 입장의 제3자가 나서서 당사자간 대화의 채널을 뚫고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모두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중재를 했을 때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합의에 이르는 중재성공률은 대개 80% 안팎으로 높은 편이다. 미국에는 중재활동이 하나의 직업으로 정착돼 있다. 현재 분쟁해결전문가협회(SPIDR)에 가입돼 있는 중재인은 3,000명이 넘는다. 변호사들 중에도 본업인 소송보다 중재를 전문으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재를 할 때는 몇 가지 원칙과 절차에 따라 다양한 기법이 활용된다. 미국에서 행해지는 중재는 한국에서 흔히 통용되는 것과 좀 다르다. 분쟁해결제도가 미분화된 한국에서는 중재란 말이 Arbitration(재정)의 의미로 쓰이거나 혼용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재정(Arbitration)은 제3자(주로 해당분야 전문가)가 해결책을 결정해 당사자들에게 제시 또는 강제하는 것이다. 반면 중재(Mediation)에서는 모든 결정을 당사자들이 스스로 내린다. 중재인은 단지 당사자들이 서로 원만한 의사소통을 통해 문제를 풀고 함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야만 당사자간 관계도 좋아지고 분쟁이 진정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중재를 한다면서 당사자들의 요구를 절충한 중재안을 만드는 데 주력하는 것은 사실 중재의 본령에 어긋나는 일이다.

사회적 합의 만드는 진전된 참여민주주의

최근 미국정부는 보다 효율적인 분쟁해결-갈등관리를 위해 법률과 전문기구 등 제도적 장치를 속속 갖춰나가고 있다. 1990년 제정된 행정분쟁해결법(Administrative Dispute Resolution Act)은 정부 각 기관으로 하여금 소송 같은 대결적인 방법이 아니라 협상 중재 등 협동적인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도록 하고 있다. 아울러 연방정부 각 부처는 제각기 분쟁해결을 위한 전문기구를 설치하는 추세다. 이런 기구들은 그 부처 특성에 맞는 분쟁해결정책을 세우고, 산하 공직자들에게 분쟁해결 관련 교육·훈련을 시키며 분쟁발생시 자문과 중재서비스를 제공한다. 현재 30여 주에서는 주 차원의 분쟁해결 전문기구를 설치해 중재 등 대안적인 방법에 의한 분쟁해결(ADR: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을 장려·보급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미국과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는 곳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어권 이주민 국가, 영국에서도 근래 중재서비스를 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중재에 의한 분쟁해결이 보편화돼 가는 추세다. 반면 프랑스, 독일 등 여타 서구국가에서는 최근 부분적으로 이런 쪽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분쟁의 효과적 해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전에 예방하거나 관리하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미국정부는 이러한 분쟁예방 및 갈등관리 제도를 발전시켜왔다. 분쟁예방-갈등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민주주의의 확대. 정부가 법규를 제정할 때, 공공정책이나 각종 정부사업을 입안·추진할 때 이와 관련된 시민 혹은 이해당사자 대표들을 의사결정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협상에 의한 법규 제정(Negotiated Rule-Making)이다. 기업 혹은 시민들의 이해관계에 직접 큰 영향을 미치는 법규의 제정 또는 개정을 추진할 때 사전에 이해단체 및 시민단체 대표들과 함께 협상을 벌여 합의안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정부가 독자적으로 법규 제정을 추진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시간과 비용이 더 든다. 그러나 정부 혼자 일방적으로 강행하다 걷잡을 수 없는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감안하면 훨씬 효율적이란 결론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일반 시민들이 법규 제정과정에까지 참여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나가는 좀더 진전된 형태의 참여민주주의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올초 발효된 미국 보건복지부(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의 의료보장제도(Medicare) 악용방지 관련 시행령 제정과정이 그 한 예다. 이 시행령이 어떻게 제정되느냐에 따라 의료계나 관련 단체, 일반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달라지게 돼 있어 전통적인 방식으로 추진할 경우 대규모 분쟁이 불가피했다. 97년 6월 관련 연방정부대표(보건복지부·법무부), 주 보건당국 협의체 대표, 전국의 의료관련단체 대표, 의료소비자단체 대표 등 총 23명이 모여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6개월 만인 98년 1월 최종 합의에 도달해 총 17페이지에 달하는 합의문 및 시행령을 공동 작성했다.

한국의 의약분업문제 못지않게 복잡하고 중차대한 사안을 다루는 이 협상이 원만히 끝나게 된 데는 중재인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분쟁해결전문가(Facilitator)의 역할이 컸다. 퍼실리테이터(적합한 국내 용어가 없어 일단 그대로 씀)는 문제의 해결과정-논의구조를 설계하고 여러 이해당사자간 회의를 원만하게 이끄는 전문가다. 특히 다자간 협상이나 문제해결을 위한 워크숍(Problem-Solving Workshop) 등에서 필수적인 존재다.

한국 시민단체의 또 하나의 역할, 갈등·분쟁 조정역

한국의 경우 협상의 문화가 아주 척박하다. 효과적인 분쟁해결제도도 마땅히 없고 중재인 퍼실리테이터 등 분쟁해결 전문가그룹도 형성돼 있지 않다. 따라서 갈등과 분쟁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악화되기 일쑤다. 그래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 시민단체의 역할이다. 미국의 시민단체는 제각기 자기 분야, 공익의 대변자로서 분쟁을 야기하고 압력을 행사하고 때로는 문제해결의 한 당사자로서 상대측(정부 또는 기업)과 협상을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단체에게는 또 한가지 역할이 추가된다. 분쟁 조정자로서의 역할이다.

참여연대 등 한국의 주요 시민단체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시민들의 신뢰도 또한 높다. 이에 따라 기대되는 역할이 바로 갈등·분쟁 조정역이다. 공공분쟁이 발생했을 때 정부는 분쟁의 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중립적 입장의 시민단체가 시민사회 내부(이익단체나 집단·지역간) 또는 국가와 시민사회간 갈등·분쟁 중재자로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민단체가 갖고 있는 높은 신뢰도에 분쟁해결능력이 가세한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중재만이 아니다. 의약분업사태처럼 시민단체가 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중재자로 나설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런 때는 해당 분쟁사안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토대로 바람직한 문제해결의 과정과 구조를 정부 등 분쟁 당사자들에게 제시하고 주도하는 것도 또 다른 차원에서 공익을 실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정부측에게 우리 풍토에 맞는 분쟁해결제도 도입과 참여민주주의 확대를 촉구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갈등·분쟁을 구조적으로 해결·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강영진 미국 버지니아주 중재인 · 조지메이슨 대학교 분쟁해결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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