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1월 2000-11-01   1936

한국의 시민운동과 신사회운동

이제까지 이 기획에서는 서구 신사회운동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 하버마스, 기든스, 월러스틴, 투렌, 푸코, 라클라우와 무페의 신사회운동론, 그리고 전자시민사회론을 검토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담론들이 우리사회 시민운동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시민운동과 신사회운동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단체의 현황과 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9년 10월 현재 우리나라 NGO는 대략 2만 개 정도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1996년 1만 개 정도였던 것과 비교해 보면 폭발적으로 증가해 왔으며, 올 초 총선에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경우 1,000 개 이상의 시민단체가 결합한 바 있다. 이 정도 규모이면 가히 ‘NGO의 르네상스’라 불러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운동의 주체와 전략

경험적 조사에 따르면 우리사회 NGO는 화이트칼라 전문사무직이 주요 회원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활동영역에 따른 회원 구성의 차이를 관찰할 수 있는데, 여성운동의 경우 전문사무직과 주부가, 환경운동의 경우 전문사무직과 학생이, 인권운동의 경우 특히 전문사무직이, 그리고 사회복지운동의 경우에는 다양한 계층들이 주요 회원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노동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중운동의 주요 회원구성(전문사무직과 판매생산직)과 비교해 볼 때 시민운동의 회원구성이 민중운동과는 어느 정도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주체 구성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은 시민운동의 이슈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즉, 시민단체들이 다루는 주요 이슈들은 환경, 여성, 정치 및 경제개혁, 주민자치, 인권, 교육, 문화, 언론, 복지, 소비자, 의식개혁, 정보화 등인데, 이러한 이슈의 목록이 갖는 특징은 ‘현대적 의제들’과 ‘탈현대적 의제들’이 중첩되어 있으며, ‘해방의 정치’와 ‘삶의 정치’의 의제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운동방식에 대한 조사 결과도 흥미롭다. <표 2>에 따르면 시민운동은 교육 프로그램, 신문 및 잡지 발행, 토론회 등을 주요 행동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집회, 시위, 성명서, 서명 또한 주요 수단이지만 민중운동과 비교해 볼 때 그 양적 비중은 다소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험적 사실이 뜻하는 바는 우리의 시민운동이 전통적인 민중운동과 서구적인 신사회운동의 점이지대(漸移地帶)에 놓여 있으며, 점차 신사회운동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시민운동에 대한 중간평가

그렇다면 우리의 시민운동은 어떻게 중간평가할 수 있을까. 널리 지적되고 있듯이 우선 우리 시민단체들은 이른바 ‘제5의 정부’로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금융실명제 실시, 동강살리기 운동, 소액주주운동, 그리고 낙천ㆍ낙선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시민단체들이 ‘영향의 정치’를 강화하고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계몽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왔다는 점에 이견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문제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흔히 지적되는 시민단체의 대표적인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여전히 저조하고, 둘째 기층대중의 참여보다도 중앙조직의 운동에 주력해 왔으며, 셋째 경실련과 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종합적 시민단체의 경우 다양한 이슈들을 동시에 다룬 백화점식 운동전략을 구사해 왔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두 번째 특징, 즉 상층 핵심부를 중심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언론을 통해 이를 여론화하는 기왕의 전략은 우리 시민운동의 지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은 현재 시민운동이 직면한 딜레마들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으므로 숙고할 만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현실을 지켜보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시민운동이 여론정치에 주력해 왔던 것은 그것이 매우 효과적인 행동수단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회원 및 자원봉사자 확보가 어렵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공공영역에서의 ‘담론의 정치’와 자발적 참여에 입각한 직접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것은 현재 시민운동의 주요 당면과제라 할 수 있다.

현실과 유토피아의 사이에서

최근 서구 신사회운동의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낙관론자들은, 현대사회의 다원성과 복합성 증대가 돌이킬 수 없는 경향이라면, ‘삶의 정치’를 둘러싼 이슈들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한, 신사회운동은 점차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반면에 비관론자들은 현대 자본주의가 급속히 ‘20 대 80의 사회’로 재편돼 가고 있기 때문에 이른바 ‘중간계급의 급진주의’로서의 신사회운동 영역은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우리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의 현실을 돌이켜볼 때 이러한 신사회운동론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뒤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개의 서구 사회이론이 그러하듯이 신사회운동론 또한 우리에게 하나의 ‘참고서’이지 ‘교과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운동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제도적ㆍ의식적 변화를 집단적 실천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신사회운동이 추구하는 ‘해방적 유토피아’를 더욱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실성이 없는 전략은 관념적 급진주의에 불과하지만, 해방적 유토피아를 상실한 사회운동은 변화의 열망을 화석화시킬 가능성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지속가능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적극 모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민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참여연대 협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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