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1월 2000-10-07   1324

[권은정의 파워인터뷰11] 누에고치 속의 여인 – 김군자 할머니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은 회색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간간이 가을을 재촉하는 비도 내리고 있었다. 오래 전 언젠가 난 경주 불국사를 혼자 간 적이 있었다. 도대체 다보탑이 천년의 역사를 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교과서 귀퉁이의 사진이나 수학여행에서 스치듯 본 것으로 내 손에 역사란 만져지지 않는 것이었다. 공허하고 외우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위안부’ 할머니 <아름다운 재단>에 전재산 기부하다” 그 기사의 주인공 김 군자 할머니를 만나러 가면서 난 아마도 역사의 실체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조심스런 예감을 가졌다. 이미 책 속에 갇혀버린 일제 식민통치. 그 질곡의 세월 속 우리민족. 역사는 내 앞에 실체를 드러내줄 것 같았다.

나눔의 집. 큰 도로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과 할머니들이 거처하는 건물이 정원을 끼고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몇 분의 할머니가 정원에서 담소하고 계셨다. 김군자 할머니를 여쭈니 이층 방으로 가라고 일러준다.

군자할머니는 자리에서 뜨개질을 하다가 방문객을 맞는다. 그녀의 무릎에 초록색 털뭉치가 얹혀있다. 스웨터를 풀어 조끼를 짜고 있는 중이라 했다. 어쩐지 그녀의 뜨개바늘은 시간을 풀어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듯 했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그녀는 쿠션을 무릎에 이리저리 괴고 앉아야 했다. 그러니 앉음새가 동그랗게 되었다. 그녀의 주위에 따스한 동그라미가 둘러졌다.

방안 벽에 <아름다운 재단>에서 드린 감사장과 그때 받은 꽃다발이 곱게 말려 걸려 있었다. 창가에 작은 국화 화분이 향기를 품은 채 놓여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으로 할머니의 성품을 알 수 있었다.

‘난 아파도 밤에 깐 자리 그대로 보전하질 못해. 힘들어도 꼭 쓸고 닦고 해야지 직성이 풀려. 이러니 나도 내가 힘들 때가 있어’

스스로에게 느슨해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자세가 몸에 배어서인가. 군자 할머니의 미소와 말씨에는 기품이 있다.

그녀는 오천 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그것도 자신에게는 전재산인 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마치 누구나 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그냥 보기엔 큰돈일 수 있겠지만, 내 마음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해요. 내가 없어서 그것밖에 못 내놓았어요. 내가 돈을 안 만져 보았으면 모르겠지만, 젊었을 적에 돈을 만져 봤거든. 적은 돈이라서 쑥스럽지. 난 그냥 내 마음을 내놓은 것인데 자꾸 확대하니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울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 내게 돈이 무에 필요가 있어. 갈 준비를 하는데 돈이 필요하지 않지. 어떤 이들은 내게 그 돈 있으면 옷도 사 입고 금붙이도 몸에 붙이고 하지 그러냐고 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 그거 다 헛일이야.’

그녀는 돈을 기부할 때 고아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쓰여지기를 원했다. 자신이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그녀는 부모 없이 큰다는 것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 일흔 다섯 노인이 된 지금도 그것은 한스럽고 애통한 평생의 고통이며 불행한 인생의 전조였던 것이다.

‘내가 열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우리 엄마는 그때 스물 여섯이었는데 딸만 셋이었어. 밥도 제대로 먹을 형편이 못되었어요. 그래서 바로 아래 동생이 일곱 살이었는데 남의 집 살이를 보냈지….. 그리고 3년 뒤에 엄마마저 돌아가셨지. 이모 집에 얹혀 있었으니 하나라도 입을 덜어야지. 이번엔 막내가 남의 집살이를 갔지. 걔도 그 때 일곱 살이었어. 난 열 셋이었고’

켜켜히 쌓인 세월의 제일 밑 장을 들쳐 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나직하고 담담했다. 감정이 풍화되어 버린 것일까. 슬픔의 낌새 같은 것은 없었다.

‘이모가 나더러 막내 동생을 애보기로 받아주겠다는 집에 데려다 주라고 해서 손을 잡고 갔지. 아, 그런데 떨어지려고 해야 말이지. 한사코 안가겠다는 거야. 동생 손목을 억지로 떼어놓고 도망 나오듯 달려나왔어. 그 동네 소학교 관목 뒤에 숨어 보았거든. 동생이 땅에 뒹굴면서, 몸을 비틀면서 우는 거야. 언니 어데 갔느냐고….’

그렇게 헤어져 세 자매는 각각 살아 나갔다. 역사의 물결, 누구든지 휩쓸려 가는 도도한 역사의 급류를 타고 그들도 흘러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세 자매에게 역사가 다 무엇이냐, 무슨 상관이랴. 다만 어린 자식을 동그마니 남겨 두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녀는 지난 세월을 죽 꿰고 있었다. 음력으로 짚어가며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모 집에 얹혀 있었는데 이모가 날 자기 시댁 쪽 민며느리로 보낸 거야. 심부름 보내는 척하며 홍계 쪽으로 보냈는데 가서보니 시댁 될 집안이었어. 가을에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던 거야…..’

민며느리로 들어간 집에서 죽어버리려고 아편을 삼켰다. 하지만 죽지 않고 닷새 동안 잠 속에 빠져 ‘운 없게’ 깨어났단다.

‘칠월 스무 나흗 날 새벽 두 시 넘어서, 대관령을 넘었지요. 강릉을 지나 주문진으로 가서 어머니 친구 집으로 갔지.’

그러나 며칠 뒤 그 곳까지 시아버지 될 어른이 찾으러왔다. 안가겠다고 버티니 묶어서라도 데려가야겠다고 어른들이 협박했다. 꿈쩍도 않는 고집불통의 처녀는 결국 경찰서까지 가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남의 집살이를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어느 순경의 소실 댁 수양딸로 들어갔다. 그 순경이 군자처녀를 트럭에 실려보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넘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나마 열 여섯의 처자에게 아름다운 봄날의 햇살이 내려앉을 시간은 허락되었다. 혹독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 결코 알 수 없었던 어느 짧은 시절.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그녀는 곱고 하얀 피부색을 지닌 어여쁜 처녀였다. 슬픔으로 어룽진 눈망울이 애잔해 보이던 이 처녀에게 한 총각은 사랑을 고백했지만 식민지의 연인은 미래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없었다. 당시 처녀공출 때문에 딸을 둔 부모들은 모두 서둘러 혼처를 물색해야만 했다. 그 총각의 부모는 아는 집안의 처자를 이미 며느리로 정해둔 처지였다. 가슴 아린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뒤 딱 한번 둘은 더 만나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북해도 징용을 갖다 왔고 그 여자는 훈춘에서 긴 세월을 보내고 와서였다. 맺어지지 못한 사랑 때문인가 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차라리 그전에 민며느리로 그냥 살았더라면 모진 운명의 칼바람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글쎄, 다 팔자지 뭐… 그때도 난 신랑 될 사람이 미운 게 아니었어. 이모가 미웠지. 우리 부모가 없다고 날 속여서 남의 집에 팔아 넘겼으니. 그게 내겐 상처가 되었어. 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거야. 나도 알아, 내가 고집이 세지. 하지만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거야. 아니라고 해서 나한테 손해가 나도, 아니건 아닌 거야. 싫어요……’

그녀가 막내 동생을 다시 만난 것은 세상이 한참이나 바뀌고 나서였다. 스물 아홉 되던 해, 주문진에서였다. 그곳의 이모 집만이 변하는 세월동안 변치 않는 주소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물 두 살인 동생은 열 여섯이나 위인 평양사람이랑 결혼해서 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동생 남편은 내가 동생을 낚아 채 갈까 봐 겁먹고 있었던 것 같아요. 늙은이 버리고 가자고 않더냐고 물었다고 그러더군요. 이틀 밤 자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동생이 배웅을 나왔어요. 바빠서 들어간다길래 그러라고 하고 차를 탔는데 차부 모퉁이를 돌다보니 애가 길가에 서서 엉엉 울고있는 거야. 내가 저걸 데리고 왜 차를 못 탔나 하며 나도 서울 올 때까지 울었지.’

둘째 동생은 한참 나중에야 소식이 전해져 만날 수 있었다. 세 자매는 그 세월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가 알 수 없었다. 혼자만의 고통을 감쪽같이 숨기고 미소를 띠고 나타난 언니더러 동생들은 어디 가서 이제 왔느냐고, 혼자서 잘살겠다고 동생도 버리고 갔다가 이제서야 왔느냐고 물어댔다. 그후 긴 세월을 다시 흩어져 살다가 둘째는 십 년 전에 갑자기 쓰러져 죽었고 막내는 여전히 주문진에 있다.

‘연락?… 자주 못하지. 할 수가 없어. 동생이나 나나 귀가 좋지 않아 전화를 못하지. 글을 모르니 편지도 못쓰지…..’

그녀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훈춘에서 일본군에게 따귀를 맞아 고막이 터진 것을 치료도 못하고 그냥 살아온 탓이다. 막내 동생은 애 많은 집에서 애보기로 고생을 워낙 많이 한데다 남의 집살이 중에 열병을 앓아서 두 귀 모두 들리지 않는다. 배우지 못했으니 편지가 무슨 소용 닿으리. 남들은 사흘이 멀다하고 나누는 전화, 핸드폰에 온갖 통신시설을 달고 다니는 이 시대이건만 자매에게는 없느니만 못한 물건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정을 나눌 자매마저 자주 못 보니 그녀의 가슴은 늘 외로움에 절어 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 낯선 게 아니다. 그녀는 ‘훈춘 3년생활’을 혼자 가슴에 묻고 지냈다. 드러내 보일 수 없는 고통을 혼자 삭이기 위하여 그녀는 외로움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 1996년까지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지원발표를 할 때까지 그녀의 말문은 닫혀 있었고 더불어 마음의 문도 닫아버린 채 살았다. 영원히 말하지 않으려 했었다.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할머니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에요. 역사 앞에 당당히 밝혀야할 중요한 사실입니다.’라고 한다. 백 번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다. 열 여섯의 나이로,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 ‘위안부’ 처녀는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것일 뿐이었다. 군자 할머니에게 있어서 그 상처는, 칼자국으로 도려진 상처보다 깊고 불에 덴 것보다 더 흉진 그 상처란, 역사가 짐 지운 것이 아니라 ‘나만의 일, 내 모진 팔자’의 결과일 뿐인 것이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그 족쇄에서 풀려나는데는 아마 억겁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훈춘에서 더 전방인 고까시라는 데가 있었는데 매일 비행기가 날아들더니 어느 날 조용해지고 누군가가 와서 너희 갈 데로 가라고 하더군요. 우리 일곱 명이서 산 길로 산 길로 나왔는데 백두산이 나오더라구, 두만강을 건너 성진 시내로 들어오니 기차에 사람들이 가득이고 소달구지에도 빼곡하게 올라타 있었어요. 그제서야 해방된 줄 알았지. 로서아 군도 총 거꾸로 메고 다니고 있고…. 기차를 타고 철원에 왔지요. 한달 여드레만에 왔어요.’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내려온 그녀는 식당 일이나 식모살이로 살 궁리를 했다. 6.25가 터지자 충남으로 피난 갔다.

‘전쟁 끝나고 서울 중앙시장에서 밥장사를 했지. 그리고 미제장사를 했는데 돈을 꽤 많이 벌었지요. 내가 미제장사를 하고 있을 땐 장사가 괜찮았어요. 사람들이 저 아주머니 물건은 가짜 아닐 거야, 저 아주머닌 속이지 않을 거야, 이러고들 사가는 거예요. 나중에는 그 장사 걷어치우고 평화시장 가서 보따리 장사도 했지요. 옷을 도매로 떼서 새벽 기차 타고 삼척 가서 팔고 그랬지. 돈을 꽤 벌었는데 돈이 모이질 않아요, 내가 서른 두 살 때에는 돈이 한 삼백 만원 정도 있었어요. 이자놀이를 했는데, 그 돈이 나가고 들어오질 않는 거야. 불쌍한 사람들한테 빌려준 건 그냥 두라고 하고 ….’

군자 할머니의 방안에 걸린 흑백사진 하나가 눈길을 끈다. 고급스런 양장차림의 우아한 여인이 작은 핸드백을 손에 든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속의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리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 일생 중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지. 서른 두 살이었을 때야. 돈걱정도 없었고.. 그런 대로 잘 살았어.’

그렇지만 스스로도 좋았던 시절이었다고 한 그때에도 그녀는 죽으려고 했다. 그것도 일주일 간격으로 연거푸 두 번이나 꼭 죽기로 작정하고 약을 먹었었다. 그녀는 살아오면서 예닐곱 번 죽으려고 했다. 그녀에게 짐 지워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내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번 공교롭게 죽지 못하고 살아났다.

‘목욕하고 옷 다 갈아입고 약 먹고 시계 쳐다보면서 누워 있으면 약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끼지…그런데 눈이 떠지고 병원에 있는 거야. 마흔 네 살 먹어서는 미제장사 할 적이었는데 이리저리 다 뜯기고 뺏기고 해서 살고 싶지가 않았어. 쥐약 사가지고 집에 들어갔지. 시장에서 어떤 남자가 쥐약하고 술 먹고 막 미쳐 뛰더니 피를 토하면서 죽더라고, 그래서 나도 약 먹고 죽으려고 한 거지. 그런데 약을 먹었는데도 아침에 깨어나 있는 거야. 참 안 죽어지데. 지금도 하느님 안 믿으면 죽으려고 몇 번이나 그랬을 거야… 외로운 게 참 견디기 힘들었어.’

그녀의 삶의 길에 언제나 죽음이 함께 걸어왔다.

‘난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볼 적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 저 사람들은 정말로 좋아서 웃고 있을까…..’

그녀의 시선 끝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외로움을 달래는 방편으로 그녀는 종교에 의지했다. 불교에도 기대었다가 세계종교에서도 위로를 받았다가 이제는 가톨릭에 귀의했다.

‘우리 아버지 마흔 두 살에 날 낳았어요. 도 닦는다고 산에 가 있다가 마흔에 결혼한 거지요. 날 낳고도 곧장 산에 다시 들어가셨다가 몇 년 뒤에 또 나오시고… 맏딸인 나를 두 분이서 얼마나 귀여워해 주셨는지…. 강원도는 전부 조, 옥수수로 밥을 해먹었는데 나만 쌀을 단지에 넣어 밥을 해주셨어요. 세상 없다고 했지요. 그럼 뭐해요. 지금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는데…..’

절에서나 성당에서나 기도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다. 기구한 팔자를 탓하는 아픈 마음이 가라앉아 심신의 평안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충남에 있는 명암사라는 절에 가서 기도를 하면서 마치 득도하는 기분도 느껴봤지, 우리 아버지처럼. 그러다가 실패를 했어요.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절도 싫고 해서 다시 남의 집 살이를 했지요. 고관대작들 집에서도 일해 보았지. 어떨 땐 팔이 부러져도 한쪽 팔로 빨래를 하면서 돈을 모았어요.’

그렇게 혼자 몸 먹일 만큼만 벌어 살다가 조용히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나눔의 집으로 인연이 닿아진 것이다.

‘파출부하며 지내다가 세계종교 들어가서 정선에 있는 기도처에서 지냈는데, 아픈 데가 많으니 병원비가 모자랐어요. 내가 거택 보호자였는데 한 달에 삼만 얼마 받아서 병원비가 안되지요. 그래서 정선군청에 찾아가서 상담원하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그 공무원이 내 생활을 안 거야. 그래서 결국 소년소녀 가장들이 사는 집에 거처를 정할 수 있었어요. 그 뒤 이곳 나눔의 집으로 오게 된 거야. 정선 있을 때 성당 가서 영세 받고 그랬지요. 거기서는 성당에 다니는 재미가 아주 있었어요…. ‘

정선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 얼핏 생기가 비치는 것 같더니 이내 사그라든다.

‘여기서 보살핌을 받으며 지낼 수 있으니 좋지, 아픈 몸으로 남한테 의지할 수는 없는 것이고… 정부에서 돈을 주니 그걸로 살수 있는 거지요. 병원치료비는 내지 않지만 한약 먹는 게 돈이 들어. 작년 늦은 봄부터는 수요집회를 못 가요. 온몸이 시리고 땀나고 한쪽 다리가 영 힘이 없어 넘어질 것 같아. 다 된 거야……’

그녀의 온몸은 수술자국 투성이다. 관절염 수술 세 번, 무릎수술, 갑상선 수술. 지금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들 중에 건강상태가 가장 안 좋다. 혈압을 재러온 간호사가 약을 챙겨주면서 찬바람을 쐬지 말라고 당부한다.

나눔의 집에는 일본에서도 자주 사람들이 오고간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녀가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배상하고 사죄해야해. 교과서에 역사적 사실도 기록하고, 사람들 위령비도 세워주어야 해. 그리고 나 죽기 전에 일본에서 배상해주면 좋겠어. 좋은 일 좀 하고 가게….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옆방에 김 옥주 할머니라고 있었거든 내가 그이한테, 언니, 죽기 전에 돈 있으면 좋은 일 해, 죽으면 무슨 소용 있어.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내가 안 죽으면 어떻게 해. 그러더니 그냥 죽어버렸잖아, 아무소용 없어. 여기 있으면 옷도 꽤 선물이 들어와요. 그래도 그거 다 필요 없어. 소용 있는 사람한테 전부 줘 버려야 해. 난 그렇게 해요. 수의도 있어요. 윤달 있는 해에 어느 절에서 보내왔어요.’

그녀는 언제라도 홀홀히 가벼운 차림으로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에게 어떤 바램이 있을까?

‘갈 적에 남의 손 안 닿게, 남한테 신세 안 지고 가는 거지. 탐나는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여름도 그렇고 겨울도 그냥 그래요. 별로 좋은 것도 없고…..’

그런데 그녀에게 한가지 매우 섭섭하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여기 근처 사람들이 우리를 정신병자로 아나 봐. 정신대라느니 뭐니 하니까… 안 그렇고서야 우리를 피할 이유가 무에야. 애들도 말 안 해요. 아침으로 내가 저 아래까지 산책 나가곤 했는데 나이 좀 든 여자도 그렇고 젊은 여자들도 그렇고 말을 안 해. 가방 메고 가는 학생들도 외면하고, 길에서 봐도 고개를 외로 꼬고 말을 안 해. 그거 보면 사실 기분 나빠요. 응, 말하는 사람이 세 사람 있지. 이장, 소 키우는 아저씨, 비닐 하우스 하는 아저씨. 참, 그리고, 할머니 한 분, 머리가 하얀 할머닌데 그 할머닌 말해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진정으로 끝나는 날은 언제일까. 영원히 아물 수 없는 상처에 아픔을 더하는 못난이들이 우리 주위에 넘친다.

군자 할머니의 오천만 원을 <아름다운 재단>의 박상증 목사는 ‘다른 이의 5천억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그냥 귀 넘어로 가는 말이기 쉽다. 그러나 군자할머니의 돈을 정말 액면가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돈에는 그녀의 인생이 통째로 녹아 있다. 언제나 목말랐던 어머니, 아버지에의 사랑, 안타까운 열 여섯 처녀의 흐느낌, 차라리 죽어지면 좋았을 외로움, 밟기도 싫은 세상 땅에 의지하며 살아온 생…. 그녀가 선뜻 내놓은 돈에는 이 모든 것이 선혈처럼 배어있다. 그래서 ‘홀로 사는 아이들을 위해 써 주오’ 라는 그녀의 말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무슨 뜻인지를 되짚어 보라는 강한 메시지로 돌아와 우리 가슴을 친다.

작고 작게 자신을 틀어 안고 안으로만 들어가는 세월을 살아온 그녀의 생은 누에고치를 닮았다. 조그만 자락이라도 행여 삐쳐나갈까 동그랗게 말아 올린 삶. 하얀 그 방이 제일 편안한 곳이다. 세상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유일한 곳. 마음 속의 고치.

자갈이 깔린 마당 가운데 작은 꽃밭이 있었다. 꽃색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비가 그친 대기를 쓸쓸한 저녁 바람이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군자할머니가 손님을 배웅하러 방에서 일어섰다. 순간 할머니의 한 그루 키 큰 나무가 쑥 솟아 나오는 것 같았다. 왜일까? 할머니가 더없이 자랑스럽게 보였다. 한번도 비겁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강인한 한 인간의 모습은 저러한 것이지. 그녀의 고치 안에서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치며 날아 나올 것 같았다.

난 오늘 아름다운 역사를 만났다.

글쓴이 : 권은정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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