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1586

노동해방에서 여성해방으로, 권인숙의 새 길찾기

노동해방에서 여성해방으로, 권인숙의 새 길찾기

몇 년 전 세대논쟁이 일었을 때 논쟁의 핵심은 이른바 386세대였다. 386세대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는 우리 사회가 커다란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였다. 어느 사람은 80년대를 ‘불 같은 터널의 시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세대가 그러지 않았으랴만 이 뜨거운 시대를 20대에 통과했던 386세대는 역사의 한복판에 서서 세상을 바꾸려 애썼던 세대다. 이 386세대를 상징하는 이름 가운데 권인숙이라는 이름이 끼여 있다.

권인숙, 80년대 위장취업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돼 어려움을 겪었던 여성 노동운동가. 권인숙 씨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 미국의 클라크 대학교(Clark University)에서 여성학 공부를 하고 있다. 박사 과정을 다 끝내고 지금은 논문 준비중. 논문 준비차 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권인숙 씨를 만났다.

인간해방 논리에 흠뻑 취했던 시절

권인숙이라는 이름이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사에 기록되는 것은 ‘학출(학생출신 노동자)’인 그가 ‘전사’라는 이름으로 들어간 ‘현장’에서 ‘위장취업자’라는 이름으로 겪은 고통 때문이었다. 82학번인 그는 85년 4학년 때 제적되었고, 86년 가을에 ‘현장’에 들어갔다.

“굉장히 어려웠어요. 공장관리자층과 지역주민이 굉장히 많이 경계를 했거든요. 무섭게 감시하는 분위기였어요. 처음 공장에 들어갈 때 면접을 봤는데 글씨를 많이 써서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나, 콘택트 렌즈를 꼈나, 이런 걸 봤어요. 그런데도 그때 뽑힌 3명이 다 위장취업자였지요."

때로는 웃어가며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고통이 컸으랴. 그 아픈 기억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바뀐 탓일까, 세상이 바뀐 탓일까. 현장에서 겪었던 고통을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20대에는 나 자신이 중심이 아니었어요…. 어려웠던 것은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였지요.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권력의지랄지, 지배의지… 자기는 변하지 않고…, 서로한테 대하는 태도에서 납득이 안 가는 이론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데서 어려움을 느꼈지요." 물론 자신은 공장생활에 적응을 잘한 케이스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흔히 생각하듯 살아가는 방식에서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공장에서 쫓겨났지만, 해야 할 일을 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어요. 물론 생활은 어려웠죠. 집과도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자주 쫓겨나니까 월급도 못받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위장취업자들은 생활의 어려움이라든가 가족과의 관계나 외로움, 부모님에 대한 괴로움보다는 민중에게 실망하는 것,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다는 사실에 힘들어 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신념에만 충실했을 뿐이지 사회를 바꾸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힘들었다는 것. 그러나 권인숙 씨 생각은 다르다.

“그런 회의를 느낄 만큼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공장에 박혀 있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 의미 규정이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맞는가, 해고투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쫓겨나는 게 맞는가, 막 싸워서 감옥에 가는 것이 맞는 가, 판단이 잘 안 서는 게 어려웠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실망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였으니까요. 오히려 저 자신의 활동력 부족이라든가 순간순간 활동의 기준이 없는 것이 어려웠지요."

그녀는 자신이 고등학교 때까지 자기 중심적이고 공명심이 컸다고 말한다. 그러다 운동을 하면서 중심을 자신에서 민중의 삶으로 바꾸고 나니까 굉장히 기뻤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해방의 논리에 흠뻑 취해"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조직에 대한 회의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민중에 대한 회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13세 때 여성해방운동가가 될 결심

그가 현장에 오래 있지 못한 것은 ‘전사’로서의 싸움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다.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세상 밖으로 다시 불러낸 것은 6월항쟁이었는데 당시 그는 마산교도소에 있었다. “노태우가 항복했다더라, 사면된다더라"는 이야기를 교도관들한테 들었다는 권인숙 씨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을 묻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좀 덤덤한 사람인가 보다"라며 웃었다. 그러나 그가 덤덤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싸움의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 권인숙 씨가 유명(?)해진 건 사면으로 풀려난 뒤다. 부천서 사건의 문귀동에 대한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귀동 사건보다는, 권인숙 씨가 언제까지나 과거의 한 사건 관련자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생각을 듣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권인숙 씨 자신이 그 부분을 지금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면 생각을 들으려 했으나 그도 내 생각에 동의해서 그냥 넘어갔다.

“80년대가 내 인생의 절정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당시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웃으면서 말하죠. 80년대를 평생 뜯어먹고 살 것 같다고요." 물론 80년대를 팔아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80년대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뜻이리라.

그 뒤 노동인권회관을 세워 노동운동을 하던 권인숙 씨의 삶은 94년에 바뀌었다. 미국 유학을 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그를 미국에 가게 만들었을까? 문귀동 사건을 맡았던 조영래 변호사의 동생이 여성학과 교수였는데 미국에 가서 공부할 것을 권한 데다 마침 여건이 되어 미국 유학을 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애였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여성해방운동가가 되려고 했으니까요. 잡지 같은 데서 본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여성문제에 조숙(?)했던 그는 대학에 들어와서 민중 문제나 군사독재 문제에 눈뜨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을 잠시 접어두었다가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의식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서 여성학을 택했다는 것.

“물론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고 싶었어요. 노동현장에서 특별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경험을 살려가고 싶은 욕심은 있었죠. 또 노동운동을 할 만한 자질이나 전문성이 없었고, 또 너무 어린 나이에 회관의 기금을 모아 나가는 일이 너무 어려웠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요."

그가 노동운동에서 여성운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성폭력 사건이 여성운동적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부이면서 노동자인 분들의 문제가 노동이론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지요. 저 자신도 결혼하면서 여자로서 규정되는 삶을 살아 나갈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하니,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또 저와 노동운동가들은 여성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지요. 여성문제에 대한 비하, 떠날 때는 그런 부분에 분노를 안고 떠났죠." 그렇다면 그의 여성학은 그 출발점이 노동운동에서의 여성문제에 대한 보수성이 될 것이다.

군사주의와 여성의 삶

그녀의 연구 주제는 ‘군사주의와 여성’. 이번에 잠시 귀국한 것도 논문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것이란다. 진보적인 여성들의 생각과 삶 속에서 나타나는 군사주의를 보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군사주의가 얼마나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들을 만나러 왔다고 한다.

군사주의와 여성, 참으로 낯선 주제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남녀갈등, 정치권력과 문화차별에 여성들이 연대해서 싸워 나가는 것이 주류라 할 수 있다. 제3세계에서는 제국주의 속에서 여성운동이 어떻게 정체성을 가져 나가는가, 각 여성이 서로 다름을 여성운동이 어떻게 포괄해 나갈 것인가 이런 것을 다루고 있다. 그도 이런 여성과 민족주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여성운동가인 신시아 엔로(Cynthia Enloe) 교수의 수업이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신시아 교수는 아동노동문제, 다국적 기업 특히 리복이나 나이키 같은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 어떻게 가부장적 권력이나 군사독재와 결탁해서 자기들의 기업을 만들어 나가는가를 연구한다. 신시아 교수의 수업시간에 자기 삶이 얼마나 군사주의화되어 있는가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놀랐어요. 제 삶을 한 번도 군사주의, 군사문화와 연결시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 군인이 싫고 군사독재가 싫다 이런 정도였는데,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사회 가운데 하나이고, 전쟁도 있었고, 그런데 단 한 번도 군사라는 관점에서 내 삶을 바라본 적이 없음에 놀랐죠. 군사주의라는 문제의식도 계발돼 있지 않았던 거죠. 가부장제나 유교문화의 잔재, 군사정권이 어떤 문화를 만들어내고, 어떤 의식을 만들어내고, 또 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데 놀라서, 논문 주제를 바꾸었어요."

여성의식과 문화에 잠재해 있는 군사주의라는 주제가 상당히 중요할 것 같아서 빨리 논문을 쓰라고 하니까 그는 웃으면서 주체성과의 싸움이니까 잘 모르겠다고, 그러면서도 돌아와 강단에 서고 싶은 생각을 은연중 내비친다.

그는 미국에서 우리 여성운동이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화 운동에 여성이 참여하면서 자기 기반을 만들어 나간 것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신대 운동이 여성운동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권인숙 씨가 미국으로 갈 때는 우리 사회가 세계화를 외치고 선진국의 사교클럽인 OECD 가입을 앞둔 시기로 흥청망청대기 시작하던 때다. 그러던 우리 사회가 무너져 내리면서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 뒤 돌아온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자신을 반성해보고 안 돼도 되게 하라는 식으로 무작정 몰고 왔던 사회 기조를 바꿀 기회가 아닐까 기대했는데 오히려 더 무섭게, 더 여유 없게 바뀌는 것 같아요. 『조선일보』의 태극기 달기 운동처럼. 지금까지 우리는 버스 운전사 같은 심리로 살아왔거든요. 폭탄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잖아요. 화가 난 사람처럼 내가 1분이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무시무시하고 아슬아슬하게, 너 죽을래 하는 심리,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한다는 심리로 살아왔는데, 그런 심리가 더 강화되는, 경제중심적 가치관으로 더욱 무장되면서 만들어지는 논리가 무섭게 느껴져요."

그는 박정희 신드롬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했다. “다수의 이득이라는 이름 아래 소수가 피해를 봐도 좋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권위를 원"하게 됐고, 그 표상이 박정희가 아니었나 싶다는 것. 이런 상황이라면 더 심한 피해를 보는 것은 여성일 것이다. 그는 몇 번씩 “당연하지요"를 되뇐다.

“여성의 지위는 경제적 부의 분배와 관계가 많잖아요. 분배할 게 있어야 여성에게도 몫이 돌아오고, 사회가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과 삶의 의미를 이해해줄 수 있는 건 민주주의 수준과도 연결되는 건데 그동안 여성은 타자화되었기 때문에 이런 때일수록 더 어려워지는 거지요."

IMF 체제가 되자마자 남편 기 살리기 운동이 있었다. 상황이 어려우니 남성들의 권위를 살려주자는 것. 그러나 상황이 좋을 때 아내들의 기를 살려주었느냐는 점을 생각해볼 때 권인숙 씨가 “전체라는 이름에서 소수는 이름을 죽여야 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성계의 대응이 약하지 않나 물어보자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여성운동 내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떤 논의가 진행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 다만 여성운동 도약의 시기가 될 수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이 사회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죠. 예컨대 고용문제도 일차적인 희생자가 여성이잖아요. 여자들이 여성문제를 현안으로 만들어 살려가지 않을 때는 여성들의 기본적인 생존권도 꾸려 나갈 수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기회죠. 물론 여성운동이 어렵지만, 여성들이 전반적인 동질성을 경험적으로 획득해 나가는 중요한 시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나 현사회 우리의 위기에 대한 권인숙 씨의 인식의 지평은 대단히 넓다. 그는 말한다. “민족주의는 다수의 이득을 위해 소수의 목소리가 죽어야 하는 건데 그 다수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시민이니 납세자니 하는 식으로 무차별하게 다수와 민족의 구성원을 만들어내면서, 실제로 다른 이익들을 전제하고 있고 다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삶의 의미를 무시해 나가는 그런 논리가 팽배한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에서 민족주의가 하나의 경제단위가 되어 나가고 생존의 기준이 되어 나가는 논리, 물론 먹고 사는 문제는 너무 중요하지요. 군축이나 복지가 사회에서 새롭게 이해되는 것도 바람직하고요. 그러나 여타 경제와 민족이라는 것이, 또 우리가 다 똑같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논리를 만들어낼 것 인가는 주의해야 돼요.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경제 논리, 먹고 사는 문제라는 논리와 전쟁의 경험적 위기감이 새롭게 부채질되고 그래서 다른 논리가 서지 못하고 있잖아요."

작은 참여가 사회를 크게 바꾼다

권인숙 씨는 시민운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참여연대가 생긴 것은 잘된 일이라고 평가한다. 시민 하면 6월항쟁에 참여했던 넥타이부대가 생각난다는 그녀는 “운동에서 전사로 나서지 않았지만 민주화, 다원화를 지지해 나가는 그러나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감을 깔고 있는 계층이 목소리를 찾아 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만 시민이 무차별 다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각자 목소리를 잘 낼 수 있는 고유의 경제활동, 고유의 삶의 기반이 있고, 그런 부분의 목소리를 다 내야 되는 거"라서 그렇다는 것. 그래서 하나의 시민단체가 그런 목소리를 다 낼 수는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면을 바라보는 시민단체들이 생겨난 것은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특히 권인숙 씨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소액주주운동이다.

“소수든 다수든 그 이득이 전체 이득의 이름 아래 가려져 있고, 자본의 논리 아래 가려져 있던 부분을 살려 나가는 운동이 일어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참여, 작은 실천 속에서 서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시민운동이 더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참여연대 회원을 비롯해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단다.

이 어려운 시대에 사회를 끌어 나가는 이론이 없다는 그는 사고방식까지 일원화하는 획일화가 우리 사회의 특성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서로 다름을 일궈내고,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의 논리가 모든 것을 휘몰아칠 때도 다른 생각이 나와서 우리 사회의 다원화를 이뤄내는 게 중요하잖아요." 말하자면 그가 바라는 사회는 ‘눈뜨고 못 볼 것’을 ‘봐주는’ 사회인데, 언제쯤 그런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이제 미국으로 돌아간 권인숙 씨가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올 때쯤?

손혁재 정치학 박사, 본지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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