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804

시민운동도 웃으면서 하면 잘될 겁니다

개그작가 전영호의 웃음이 이는 시민운동론

저질로 먹고 사는 사람한테 뭐 들을 얘기가 있으려나. 더구나 시민운동하는 분들이?"

당황(아니 뒤집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했다. 저질의 의미가 좀 변했나? 아니면 우리 사회의 ‘똘레랑스(관용)’문화가 이 정도에까지 다다랐나? ‘무대포정신’에도 앞뒤가 있고, ‘솔직 담백’에도 허용 수준이 있지 않던가. 개그계를 평정하면 일국의 대통령도 부럽지 않다는 속설을 약간 부풀린다면 한때 개그계는 저질 대통령이 주름잡는 시절이었다는 얘긴가.

오늘도 개그펀치라는 독보적인 장수 코너(벌써 10년이 넘었단다)를 이어가는 개그작가이자 방송진행자 전영호 씨(47세)와의 대면은 이런 복잡한 심경으로 출발했고, 자연히 시작은 그 복잡한 심경부터 풀고 볼 일이었다.

‘저질’이 되고자 최선을 다한다

“저질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공급자인 셈이죠, 뭐. 그렇지만 수요자인 독자들과 시청자를 위해 저질이 되고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드물죠. 그리고 저의 저질이 가식이나 포장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혼란이다. 저질로 승부해 성공했다? ‘달관’과 ‘구제불능’이라는 극단의 지점을 정신없이 오가는 필자(솔직히 이때부터 자기 암시를 시작했음을 고백해야겠다. 오늘은 새로운 생의 가치관을 접하는 날이라고.)

“말을 못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뭔지 아세요? 말을 꾸미는 겁니다. 내용 없이 포장만 화려한 거죠. 생각해보세요. 두돌이 채 안 지난 갓난쟁이가 엄마한테 ‘어머님, 2년 전 저를 낳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습니까? 그뿐입니까? 큰형님을 위해선 도시락을 준비하시고, 아침마다 속쓰린 아버님을 위해 술국까지 끓이시니 그 노고가 하늘을 가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 배가 심히 고픈데 젖 좀 주시지 않을런지요’라고 말한다면 공감하겠어요? 차라리 어눌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편하게 말을 하는 것이 더 솔직하죠. 그런 점에서 동네아저씨 같은 말주변에, 꾸미지 않은 제 말이 훨씬 사회적이라 자신합니다. 돌아보세요. 오늘 우리 사회를 이 꼴로 만든 사람 가운데 말 못하는 사람 어디 있나(‘학실히’ 뇌리를 스치는 몇몇이 있긴 하다)."

그래서 ‘저질’은 꾸며진 모습, 닫힌 모습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에 대한 나름의 비명이자 선전포고에 다름아니라는 것이 그의 설명. 그러고 보면 먼 훗날 전해질 야사에선 ‘열린 성교육의 전령’으로 격상할지도 모를 그의 끈적한 ‘육담’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후식문화를 보자고요. 남 흉보지 않으면 음담패설이에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부정할 수 없는 에너지 아니에요? 더구나 시원하게 웃을 일 하나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한 사람에게라도 웃음을 준다면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국민에게 웃음은커녕 실망만 주는 정치인들이 진짜 저질 아닙니까? 이것이 웃음 없는 사회를 싫어하는 제 존재이유이자 신념입니다. 스스로 세상의 직업 가운데 웃음을 창조하는 가장 축복받은 직업을 가졌다고 자부합니다. 사람에게만 웃음을 준 의미가 뭐겠어요(그런가?)".

솔직함과 포장의 사이에서

‘저질의 미학’이 만개한다. 그러기에 때론 야비하고, 때론 집요하리만치 사생활을 쫓아야 하는 ‘악역’도 이중적인 성문화에 대한 반기이자 공론화의 시도이며, 그에 따른 따가운 눈총도 맡은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음을 증거하는 이면에 해당한다.

한데 이상한 구석이 있다. 그렇게 솔직함을 지향하고,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그가 어떻게 방송이라는 최고의 ‘포장상품’에 몸담게 되었을까?

“사실 궁합이 안 맞죠. 그런데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작가로서 바라보는 세상을 말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서울역 노숙자들이나 환각에 빠진 청소년들의 웃음을 말하고 싶어요. 얼마 전 지방에 갔다가 저를 모르는 여중생 몇을 만났어요.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까 한 아이가 3만 원만 주면 놀아주겠다더군요. 잠자리를 원하면 10만 원을 더 내야 하는데 한 아이는 30만 원을 받아야 한데요. 처음이기 때문이라더군요. 어른이 된 뒤 처음 울었던 것 같아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도 싶고, 그 속에서 웃음을 되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슬픔 속에서 피어난 웃음. 가식 없이 드러냄으로써 다가오는 감동. 이와 관련된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지금도 적잖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밤으로 가는 쇼 -- 이경애 편>. 넉넉하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만 보이던 이씨를 초대한 것은 전영호 씨와의 ‘남다른 사연’이 크게 작용했다. 이씨가 초년생이던 무렵 점심때만 되면 슬쩍 사라지는 이씨를 두고 한번은 그가 따끔하게 충고했단다.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데 알고 보니 당시 이씨는 점심 해결조차 힘이 들던 상황.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 더 이상 염치가 없어 슬쩍 사라지는 것으로 감추었던 것이다. 늦은 밤 예전의 고생을 고백하며 굵은 눈물을 흘리는, 그러면서도 웃음을 놓지 않고 살아온 이씨에게서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성인개그부터 어린이 개그연극까지

남을 웃기는 이들의 공통점 가운데 가족에게는 지나치게 엄하다는 ‘설’이 있다.

“어떤 아버지이고 싶다는 것보다 나도 살아가고, 아이들도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대신 판단은 스스로 한다는 원칙 아래서요. 그래서인지 보통의 경우처럼 명령과 의존적인 관계는 아니죠. 지난해 고2 딸아이가 그래요. 공부에는 별 능력이 없는 것 같으니 여상으로 옮겨 달라고. 그렇게 했어요. 본인이 진지하게 결정한 것이니 존중해야죠. 이성친구가 와도 방문을 열어놓고 얘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아요. 그건 월권이거든요."

지금 대학생인 아들은 고3 때 정신지체아들이 생활하는 인천 장봉도에서 ‘노가다’를 자처했다. 그 못지않게 자녀들도 ‘비정상’인 것 같다는 농담에 전씨도 동의한다. 그것이 그의 교육방식이라는 것(사실 그의 개그 영역은 신문, 방송을 통한 성인개그뿐 아니라 웃음과 교육을 동시에 고려한 동화책, 어린이 개그연극에까지 확장해 있다).

정신없이 ‘해치워야’ 했던 첫 대면 말미에 전영호 씨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인터뷰를 고사했냐고.

“목적을 가지고 만나면 본의아니게 꾸미고 부풀리게 되잖아요. 그게 싫어요. 근데 말이에요. 참여연대와 같이 시민운동하는 분들도 웃으며 살자고 운동하는 것이라면 본인들이 즐거워야 하지 않아요? 당연히 시민에게 웃음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요. 웃고 사세요."

여의도에서 안국동으로 옮겨앉은 주막 ‘동루골’ 아주머니를 얼마 전 지나는 길에 찾았다가 손에 끌려 ‘마지못해’ 가입하게 되었다는 그는 색다른 걱정(?)을 내비친다.

“참여연대가 얼마전 카페 ‘철학마당 — 느티나무’를 열었잖아요. 개업식 날 갔어요. 한데 장사 잘 되나요? 사실 저같이 품위 없는 사람들이 드나들어야 장사가 될텐데. 맥주 2병 놓고 밤새 이야기 나눌 사람들만 오는 것 아니에요?"

손지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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