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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1998년 11월
  • 1998.11.01
  • 243
극단의 시대, 야만이냐 이성이냐
올 10월부터 『한겨레시평』 필자로 등장한 월든 벨로(Walden Bello)는 몇 차례 국내 언론에 소개된 필리핀의 경제학자다. 그러나 벨로가 신자유주의와 맞서는 존경받는 국제 시민운동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무역기구(WTO), 아태경제협력기구(APEC), 아시아유럽협력회의(ASEM) 등 무역자유화, 투자자유화, 금융시장 개방의 바람이 불고 있는 곳, 또 미국과 불평등, 빈곤이 따라 다니는 곳에서는 항상 벨로의 이론과 활동을 볼 수 있다. 제3세계의 비판적 시민운동에게 벨로는 교사이기보다 사실 전사에 가깝다.

그는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시간만큼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세력들과 만나거나 행동한다. 그의 사무실도 교편을 잡고 있는 마닐라와 시민행동의 근거지인 방콕 두 곳에 있다. 또 국제그린피스와 다국적기업연구소(TNI, 다국적기업감시 전문단체)의 이사이기도 하다. 특히 방콕 출라롱콘 대학 내에 위치한 포커스(Focus on the Global South)는 국제 자본의 횡포와 아태지역 군수무역을 감시하고 대응하는 일종의 아태지역 시민운동센터 비슷하다. 외국 투자기업의 권한을 대폭 확대시키려는 다자간투자협정(MAI)의 체결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연대운동의 중심에도 벨로와 포커스가 있다.

일찍이 한국식 경제발전 모델의 취약점을 간파했던 『곤경에 처한 용들(Dragons in Distress)』과 미국식 구조조정의 야만성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어두운 승리(Dark Victory)』, 그리고 식량독점과 국제 불평등구조를 다룬 10여 권의 저서를 보면 벨로의 끈질긴 논쟁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그 속에 숨어 있는 가난한 민중들에 대한 애정도 느낄 수 있다. 실제 그를 만나보면 작은 체구에 에너지를 내뿜는 분위기를 가졌다. 그의 활동력은 누구나 감탄할 정도다. 민간단체들이 주관한 국제회의장에서 듣는 그의 기조 연설은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세계 구조에 대하여, 경제 선진국들의 위선에 대하여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으로 동시에 판단할 것을 촉구한다.

나는 벨로 교수를 꽤 여러 번 만났다. 1995년말 오사카에서 아펙(APEC)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정부간 회의와 병행해서 민간단체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벨로는 그 회의의 조직자였고, 기조연설자였으며, 결의문 기초위원장이었다. 그때 나는 권력과 싸우는 확대된 장에서 뛰어난 실천가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국내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벨로는 “세계무역기구와 같은 체제는 바로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을 노리고 있는 것이니 한국은 특별히 경계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섣부른 OECD가입이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의심했던 사람들에게 이 지적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벨로는 몇 차례 한국에 올 때마다 이 말을 빼먹지 않았다.

바로 이 분야(아시아 경제기적의 허구를 파헤치고 그를 통해 미국의 패권구조를 뒤집어 드러내는 일)가 그의 장기다. 미국과의 관계 등에서 필리핀과 비슷한 면이 있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보면서 그는 민주화를 해낸 분들을 “매우 존경한다"고 한다. 아시아 각국의 사회운동을 힘껏 지원하면서도 그는 한국의 시민사회, 한국의 비판정신이 아시아 지역에 기여할 것이라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한국의 이익을 넘어서 아태지역의 군축, 평화, 대안적 안보체계, 지역적 경제협력, 민주화 촉진 등의 주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비판정신이 아시아에 기여할 것

벨로는 저항의 전사인 것만은 아니다. 그와 포커스가 추구하는 지향은 “지속가능한 지구 패러다임"의 형성이라고 이름붙어 있다. 성장 중독증에 걸린 사회에서는 언뜻 낭만적인 유토피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선진국과 개도국의 비판적 시민사회가 그동안 축적했던 토론과 조사, 다양한 경험에 근거한 아래로부터의 유토피아 구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펙체제의 대안, 아태지역 대안안보 체계, 신흥공업국의 사회문제 분석 프로젝트, 세계화에 대한 문화적 반응, 변화하는 시민단체의 역할과 책임성-이는 포커스가 국제 민간연대 네트워크로 펼치는 주력 사업 제목들이다. 그리고 이에 관련된 주장과 자료는 진지하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벨로는 국제 식량문제 전문가로 출발했기 때문에 글을 쓸 때 세계구조를 가난, 먹을 것, 빈곤을 둘러싼 국제 패권관계를 통해서 설명한다. 그의 펜이 움직일 때 미국 역시 할리우드 식의 킬러자본주의 미국으로 바뀐다. 식량 문제가 다시 한번 인간의 고귀한 문제로 다가온다. 여기에 그의 행동이 뒤따르면 민주주의와 환경, 사회정의를 좀먹는 자유시장론자들의 무절제한 경제정책은 심각한 암초를 만난다. 동시에 세계화에 피해를 당하면서 각성한 사람들의 연대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벨로와 같은 사람을 통해 진지한 사상은 연대적 행동과 쉽게 결합된다.

새로운 보편성을 향한 저항이 필요한 때

벨로의 책에 가끔 소개문을 쓰는, ‘신자유주의반대전선'에서 함께 하는 수전 조지(경제학자, 현재 프랑스에서 다자간투자협정을 저지하는 시민운동 연대전선을 주도)는 “사상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과 몇 개의 거대 기업이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극단적 풍요와 극단적 빈곤이 병존하며 가장 짧은 순간에 가장 많은 자원을 가장 비합리적으로 소비하는 극단의 시대에, 벨로는 우리에게 야만과 이성의 사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라고 단호하게 말한다(『어두운 승리』 중에서).

그리고 이성의 사상은 노동운동과 공동체운동, 평등을 지향하는 시민운동, 생태주의 운동이 기업의 지배논리와 정치적 반동에 대항하면서 공통으로 제기하는 보편적 논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는 과거 수십 년 동안 노동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이 국경을 넘어 공동의 싸움을 벌이고 상당한 성과를 거둔 보편적 경험에 입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업 권력을 강화하면 미래가 주어진다는 신자유주의적 보편성과 세계 곳곳의 저항과 대안 모색 속에 엷게 스며들어 있는 보편성 중에서 벨로는 후자에 우리의 이성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보편성을 향한 저항, 남다른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특전인 듯하다. (벨로의 활동에 더 관심이 있다면 인터넷 포커스(http://focusweb.org/)를 열어 보거나 직접 문의하면 된다.)
이대훈 참여연대 협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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