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1월 1998-11-01   1656

드라마로 본 역사의 왜곡

박정희 살리는 드라마 (왕과 비)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뒤에 세조가 된 인물이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되는 과정은 결코 정상적이고 원만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 계유정란이다.

현재 KBS-TV에서 방영하고 있는 사극 <왕과 비>는 이제 막 계유정란을 지나 수양대군이 새 국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사극에서 묘사하고 있는 당시의 역사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병약한 군주 문종이 2년 남짓 재위한 뒤 죽게 됨에 따라 어린 국왕 단종이 재위하게 됨으로써 정치의 혼란이 초래되었다. 둘째, 수양대군은 분수를 모르고 왕이 되려고 하는 동생 안평대군의 불행을 막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여 계유정란이 일어났다. 셋째, 계유정란의 다른 원인으로는 정승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이 왕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권력을 천단한 문제가 작용하였고, 수양대군은 이를 시정하고자 먼저 김종서 등을 죽인 뒤 단종에게 일러 주었다. 넷째, 수양대군은 국왕이 되려는 야욕은 물론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는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로, 다만 국가의 운명과 왕실의 체통 및 권위 유지를 걱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명회 등 측근들에 의해 수양대군은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 군주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대체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부합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내용이 사실이라거나 진실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학계에서는 앞의 내용 전반을 뒤집어서 이해하고 있다.

(왕과 비)가 교훈적 역사로 흐른 까닭

(왕과 비)에서 묘사하는 내용이 학문적인 정설과 대립되는 문제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종래에는 기존의 역사소설이 사극의 저본으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왕과 비) 역시 김동인의 『대수양』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듯한데, 한편으로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자체를 직접 이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사극이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원사료를 엄밀한 비판 없이 이용할 때에는 커다란 잘못을 빚을 수도 있다.

교훈적 역사란 역사 이해가 학문 외의 목적에 종속되는 것을 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사회 때에는 의도적으로 교훈적 역사가 장려되었다. 우리의 경우 주로 정치적 이념적 목적에서 교훈적 역사가 유행하였다. 그 결과 여왕을 낮추어 여주라 표현하고, 실제 사용했던 호칭을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쳐서 쓰기로 했으며, 앞 왕조 말기의 역사를 왜곡하기 십상이었다. 즉 교훈적 역사는 주관적이며 때로는 분식되거나 가공되기도 한다.

실록도 교훈적 역사라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특히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주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실록’의 기록이므로 사실일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순진한 오해이다. 실록은 1차 사료가 아니라 2·3단계 가공된 기록이며, 1차 사료라해도 사료 비판을 거쳐야 그 이용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왕과 비)는 학문적으로 제시된 정설을 존중하기 보다 실록의 기록을 더 존중하다가 당시의 ‘교훈적 역사’가 남긴 함정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학문적 연구 성과는 실록의 해당 기록들에 대한 사료비판을 바탕으로 얻은 결과이다. 그것을 (왕과 비)에서는 다시 세조시대의 인식으로 되돌려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수양대군=세조시대’의 진실과 교훈은?

그렇다면 수양대군=세조 시대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먼저 진실부터 살펴보자. 지면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어린 왕이 즉위함으로써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다는 묘사를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당시는 조선 건국후 60년이 지나, 이미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때였다. 새 왕조의 제도적 장치는 태종 때 큰 골격이 잡히고 세종 때 다듬어져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린 왕이 즉위해도 큰 정치적 혼란을 빚을 이유가 없었다. 성종은 단종보다 불과 한살 많은 나이로, 단종의 즉위후 채 20년이 지나지 않은 시기에 왕이 되었다. 오히려 단종은 세자로서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은 바 있지만, 성종은 갑자기 왕위 계승자로 선택되어 군주가 되었다. 그럼에도 성종은 무난히 왕업을 이룰 수 있었다. 학계의 정설로 보면 정치적 혼란의 중심 책임자로 수양대군이 지목된다. 김종서 등의 관료세력이, 대군들이 정치세력을 규합하는 것을 방지하려 하자,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을 사주하여 정면돌파를 시도함으로써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유정란의 주도자와 책임의 소재도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극에서 묘사된 것과 반대로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욕이 참화를 빚었다고 보는 것이다. 계유정란의 원인에는 능력 있는 관료들의 조급증도 큰 몫을 하였다. 사실 32년에 걸친 세종시대에는 사회가 안정되면서 종래와 달리 승진이 쉽지 않았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오히려 학문 연구기관인 집현전 등에 매여 있어서 정치적 성취를 이루기 어려웠다. 뛰어난 무예를 가진 자들에게도 양상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정변은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세조시대가 남긴 교훈은 주로 정당성이 없는 정변이 초래한 문제들과 정변 이후 빈발한 반란 진압과 관련하여 비대해진 공신세력 간의 갈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세조의 정치적 업적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세종 때까지 이루어진 문물제도의 정비를 완수한 것으로, 『경국대전』 편찬이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군사력의 강화이다. 그러나 공이 과를 덮기 쉽지 않아 보인다. 먼저 권력의 정통성이 약화된 결과 평안도 4군지역 주민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며 거주지를 고수하도록 강요할 수 없었고, 결국 세종 때 개척된 4군은 세조 초엽 폐지되었다. 또한 공신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이익이 옹호되는 쪽으로 국가 정책의 기조가 변하기 시작하여, 국가 재정은 차츰 위축되어 갔다. 지주가 무는 토지세의 비중이 줄고 서민이 무는 공물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도 이 시기에 부쩍 강화된 양상이었다. 결국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공신이라는 특권층을 양산한 결과가 무엇인지는 여기서 드러난다. 이것이 이 시대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부당한 권력장악과 공신 양상이 주는 역사적 의미

역사를 소재로 삼는 사극에서 수양대군만큼 자주 주인공이 된 인물은 드문 듯하다. 극적인 삶의 내용이 있는 데다가 쓸만한 역사소설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왜 하필 IMF관리체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즈음 수양대군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가에 있다.

우리 사회는 요즘 경제적 곤경을 타개할 수 있는 개혁이 절실히 요망된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에 부딛쳐 제대로 이루어지는 개혁이 거의 없다. 이에 따라 사회 일각에서는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경제개발을 추진한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수양대군의 진실된 면모가 어떤 지는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학계의 정설과 달리 묘사되고 있는 (왕과 비)의 수양대군은 ‘박정희 시대 향수’나 ‘박정희 살리기’ 등의 박정희 이미지와 오버랩되는 것이 사실이다.

IMF관리체제를 초래한 원인과 책임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세력의 형성 과정은 명확한 편이다. 관변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의 기득권세력 대부분은 멀리는 1961년의 5·16을 계기로, 가깝게는 1979년의 12·12사태를 바탕으로 이룬 독재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에 작용하는 문제점도 분명히 있다. 주인공과 그 측근세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드라마는 흥행에서 성공을 거둘 수 없다고 할 때 박정희, 전두환 등 제씨를 연상케 하는 수양대군이 이 시점에서 부각되는 문제는 심각하게 재고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오종록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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