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1월 1998-11-01   1082

서울은행과 청구의 합동금융사기에 철퇴 가하다

서울은행과 청구의 합동금융사기에 철퇴 가하다

그의 별명은 ‘빨간 도깨비’다. 유난히 길었던 올 여름의 장마를 헤치고 한 달여의 짧은 기간 동안 투쟁을 승리로 이끈 그를 사람들은 머리에 뿔난 도깨비쯤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교조 선생이라는 딱지 때문에 ‘빨간색’이 덧칠해진 도깨비. 은행이라는 철옹성같은 상대와의 싸움은 처음엔 누구라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만큼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의정부 민락 2차 아파트 입주예정자들과 서울은행과의 싸움에서 주민들은 지난 8월 6일, 은행으로부터 합의각서를 받아냄으로써 백성의 힘을 입증해 보였다. 7월초 비상대책위 소집에서부터 합의각서를 받아내기까지 근 한 달 동안 그들의 투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다각적이었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언론의 생리를 익혀온 김대유 선생의 노하우가 숨어 있었다.

김대유 씨(37세). 서문여중 한문교사인 그가 이 싸움에 뛰어든 것은 지난 7월초. 그는 내집 마련을 위해 모아둔 돈을 계약금으로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나머지 중도금은 기일에 맞추어 대출받아 메꿀 계획이었다. 그런데 12월, 청구가 무너지고 잇따라 돈을 받은 정치인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갔다. 그래도 정부가 있고 주택공제조합이 있으니 힘없는 서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어쩌지는 않겠지 하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해가 바뀌어 5월이 되었는 데도 아파트는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기계는 멈춰 서 있었다. 6월이 되자 불안해진 몇몇 사람들이 모여 주거래 은행인 서울은행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들은 날벼락같은 문건을 발견했다. 아파트 계약후 며칠도 채 안되어 입주민들 아무도 모르게 중도금 8,000만 원이 입주민들 앞으로 일괄 대출되었고, 그에 대한 이자 지급 시일이 바로 코 앞에 닥쳐 있었던 것이다. 7월 16일까지 매달 138만 원씩의 이자를 지급하지 않으면 가압류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통지서가 발송되기 위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중도금 낼 날짜도 멀었는데 당사자도 모르게 중도금이 대출돼 있었다는 건 뭐며, 그에 대한 이자는 또 뭐란 말인가. 입주민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안 것은 IMF가 터지고 건설경기가 위축되자 정부에서 아파트 분양을 촉진하기 위해 중도금 일시 대출이라는 새 제도를 내놓았는데 그것이 첫 케이스였던 모양이다. 그 제도의 취지는 중도금을 미리 일괄 대출받는 대신 이자와 원금을 입주시에 한꺼번에 내도록 하는 것이므로 서민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청구가 부도나는 바람에 그 부담을 고스란히 계약자들이 떠안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약서 상에나 구두로도 아무런 얘기도 없이 건설회사 마음대로 일괄대출을 받은 것은 명백히 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나아가 이런 대출 관행 자체가 위법이라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건설경기가 불안한 때 건설회사만 믿고 중도금 전액을 대출받았다가 나중에 건설회사가 무너지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는가? 거의 같은 시기에 남양주와 오산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어 분양계약자들이 들고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2만 6,000세대의 아파트 계약자 중 무수한 피해자들이 속출할 것은 불보듯 뻔했다.

우선 입주예정자 모임을 가졌다. 그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싸워봤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재산도피할 궁리를 하고 있는 비관파와 ‘설마 내 재산 뺏어가랴’ 하며 수수방관하고 있는 낙관파, ‘끝까지 내 재산 지키기 위해 싸우자’라는 투쟁파가 있었다. 투쟁파 30여 명으로 비상대책위를 구성했다. 그들은 대부분 주부, 말단 공무원, 회사원 등이었고 힘있는 검찰, 법조계나 부동산업계 사람들은 빠져 있었다.

비대위는 우선 은행과 관청, 보증보험회사 등을 방문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완벽하게 주민들이 뒤집어 쓸 상황이었다. 정치인들은 ‘나 몰라라’하는 식이었고, 엄밀하게 말하면 책임이 있는 관료들은 책임회피에 바빴다. 은행 쪽에서는 간부급조차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은행 간부는 소송을 하라고 했다. 입주자들이 50%만 손해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라 돈으로 은행이 운영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얘기인 것이다.

주민총회를 거쳐 일단 투쟁하기로 하고 그들은 이 사건을 ‘금융 사기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투쟁의 초점을 청구나 관료가 아니라 서울은행으로 맞추었다. 결과적으로 그 작전이 주효하게 맞아 떨어졌다. 김대유 씨는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다져진 언론과의 친분을 십분 이용해서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렸고 드디어 언론이 이 사건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KBS와 MBC <9시뉴스>에 이 사건이 보도됐고, 연일 신문에 나와 처음으로 국민들이 이러한 금융 관행의 비리를 인식했다.

7월 중순부터 8월초까지 주민들은 매일 데모를 하는 한편 은행장과 실무자들, 임창렬 경기도지사, 의정부시장, 국민회의 정책위원들을 만났고 국회의원실과 언론사로 팩스를 보냈다. 서울시내에 있는 서울은행 각 점포에 근무하는 은행원들에게 호소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7월 20일에는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의 유서전달식을 가져 어린이들이 ‘대통령께 드리는 글’을 눈물바다 속에서 읽기도 했다. 이날 서울은행장과 관계자들에 대한 형사고소식을 함께 가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주민들의 가슴에 남은 것은 개인 재산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사회 비리를 처단하겠다는 책임감이었다. 많은 피해 사례들 중에서 언론에 처음 다뤄진 이 사건은 ‘우리가 무너지면 전부 무너진다’는 비장한 결의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싸움의 양상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서울은행 측의 비리를 포착한 비밀문서를 입수했고 문서팀은 두툼한 책 한권 분량의 증거물에 일일이 스티커를 붙이는 준비성을 보였다. 특히 주부들로 구성된 일명 ‘특공대’는 전단을 뿌리거나 은행 내부문서를 꺼내오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방송사에서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할 특집을 만들고 있었고, 참여연대 쪽에서는 공개질의서를 은행 측에 보내는 한편 대표고발을 준비했다. 또 2002년 월드컵 후원사인 서울은행의 이미지를 공략하여 PC 통신의 붉은악마 동호회에 연락하여 은행 전면의 월드컵 후원사 사진을 내리도록 했다. 주한 외국계 은행에 서울은행의 부당함을 알리고 주한 외국 대사관에도 정부의 수수방관 자세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런 최악의 사태에도 국회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8월 6일 신복영 서울은행장과 임직원 15명, 아파트 입주예정자 대표단 3명은 오후 2시부터 장장 5시간 반의 마라톤회의에 들어가 결국 쌍방의 원만한 합의에 의한 합의각서를 만들었다. 이미 대출된 중도금에 대한 이자에 대해 계약자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는 내용의 은행 측 백기 항복이었다. 합의각서만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양상이 크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임은 자명했다. 만일 은행이 약속을 안 지킬 경우 전면적으로 금융비리를 파헤칠 책 한 권은 충분히 펴낼 수 있는 자료가 얼마든지 쌓여 있다고 한다.

비대위의 간사로서 활동하면서 김대유 씨는 주민들의 똘똘 뭉친 단합과 환상적인 팀워크가 가장 큰 승리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2주에 한 번은 꼭 주민회의를 통해 동의를 거친 후 행동에 들어가고, 행동 1주 전 반드시 은행에 통고하는 투명성을 확보한 것도 주효했다. 특히 비대위의 80%를 차지한 말단 공무원과 주부들의 힘은 대단히 컸다. 온몸으로 집행부의 얼굴이 되어 준 박혜경 위원장을 비롯 주부들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여성의 힘이 위대함을 일깨웠다. 이 일을 하면서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 입주민 300여 명이 한꺼번에 참여연대 회원으로 등록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는 등 해프닝과 곡절도 많았다. 결코 짧지만 짧지 않았던 지난 여름 한 달. 그러나 그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 고비를 넘으니 그동안 똘똘 뭉쳤던 단합이 느슨해져가는 양상도 보이길래 비대위 구성도 새로 하고 투쟁의 양상도 바꿔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이제 아파트공동체운동의 싹이 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틔워질 것을 기대해봐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김라 본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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