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894

국고로 편입되는 민간모금

수재의연금은 정부 쌈짓돈

9월 6일 각 언론사를 통한 수재의연금 접수가 마감됐다. 그동안 모인 성금 액수는 480억 원 정도. IMF로 국민 모두 잔뜩 허리띠를 졸라매는 형편인데도 예년보다 많은 성금이 모였다. 두 달째 월급이 동결되어 돈에 쪼들린다는 김성태 씨(29세·회사원)도 회사에서 수재의연금을 걷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일주일 용돈으로 받은 3만 원을 남김 없이 냈다.

“하나도 안 아까웠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거예요. 하지만 저보다는 수재민에게 그 돈이 더 유용하게 쓰인다는 게 사실이잖아요. 아내도 ARS를 이용해 4,000원을 냈다고 하더군요. 얼마 동안 생활이 힘들겠지만 수재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정도는 참아야지요."

성금을 접수한 사람들은 저금통을 턴 어린이부터 자식에게 받은 용돈을 모았다는 노인까지 갖가지 사연이 즐비하다. 국민 대다수가 ‘내가 돈을 내면 수재민이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에 그렇게 주머니를 턴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성들여 의연금을 모아도 수재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법정 위로금이 전부. 법정 위로금은 수해를 당한 피해 정도에 따라 법으로 규정된다. 수재의연금이 한푼도 모이지 않았을 때나, 수재의연금이 많이 모였을 때나 법정 위로금은 같다. 조금이라도 수재민에게 더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성금을 내지만 의연금의 집행 과정상 모금한 액수는 수재민에게 돌어가는 혜택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민간모금을 국고에 편입하다니…

경기도 연천 파주 등지에 커다란 물난리가 났던 1996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의연금 331억 원에서 295억 원이 수재민에게 지급되었다. 그 사용처는 법정 위로금 109억 원, 특별 위로금 110억 원, 추석 위로금 76억 원으로 수재민에게 나간 위로금의 전부가 의연금에서 지급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정흥수 내무부 방재국장은 “국민이 이재민에게 전달해 달라는 성의의 뜻도 들어 있고 해서 그렇게 지급하도록 이번 보건복지부가 조치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법정 위로금을 지급하는데 의연금이 모자랐다면 “국고에서 지급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재해복구 관련 법령은 1996년 제정되었고, 1997년 개정된 「재해구호 및 재해복구비용부담기준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15394호」에 따르고 있다. 이 법은 의연금에 대한 분배도 규정하고 있다. 의연금은 사망·실종·부상자의 위로금 및 생계보조, 이재민 구호 및 생계지원에 지급되도록 명시되어 있다. 만약 의연금이 부족할 경우에는 국고에서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수해복구예산을 산정할 때 의연금으로 거둘 액수를 미리 산정하여 정부의 복구예산으로 편성하고 있다. 이번 수해대책과 관련한 8월 20일 국회 보고를 보면 행정자치부가 마련한 수해복구 소요액 항목에 의연금 356억 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 손혁재 정치학 박사는 “민간이 거둔 모금을 정부가 국고 예산에 편성시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한다.

현행 우리나라의 민간 모금은 「기부금품모집규제법」과 「사회복지공동모금법」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이 법은 민간의 모금을 금지하는 것으로 모금이 이루어졌을 경우, 그 돈의 관리와 집행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 일원화하도록 하고 있다. 민간단체의 부정을 방지한다는 취지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절름발이 모금기구 ‘전국재해대책협의회’

수재의연금도 당연히 이 법의 규제를 받는다. 수재의연금을 모금하는 단체는 「전국재해대책협의회」(보건복지부 등록)로, 언론사와 각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협의회에서 하는 일은 재해에 관련된 민간모금 활동과 그에 따른 총괄 업무. 그러나 모금활동의 시작부터 협의회는 정부에 구속되어 있다. 재해가 발생하게 되면 협의회는 행정자치부에 모금명·모금기간·모금액·모금방법 등을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 모금을 시작한다. 모금이 끝나면 정부의 피해조사와 복구계획에 따라 보건복지부 장관의 요청을 받아 의연금을 내준다. 그리고 의연금의 분배와 집행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맡아서 한다.

올해의 경우 전국재해대책협의회는 8월 7일부터 9월 6일까지 ‘신문·방송을 통한 자발적인 기탁모금’ 형식으로 300억 원을 모으겠다고 허가를 받아 총 480억 원을 모았다. 이 돈은 정부의 공식적인 피해조사가 끝나는 9월 10일 이후에 정부의 수해복구대책에 포함되어 집행되었다. 이 과정 때문에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의 강철희 교수는 수재의연금이 민간모금의 형식만 갖추고 있지 민간주도의 모금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재해대책협의회는 민간기구의 명칭을 내걸고 있지만 역할은 관변단체와 같습니다. 수재의연금 같은 경우 가장 중요한 목적이 돈을 거두는 데 있지 않고 수재민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재해대책협의회가 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부가 피해조사를 통해 예산을 결정하면 거기에 따라 돈을 건네주면 그만 아닙니까? 의연금을 걷는 민간기구 역할을 하려면 그 분배와 집행에서 최소한 감시 역할 정도는 해야 된다고 봅니다."

전국재해대책협의회의 김재호 사무계장은 이런 지적에 대해 협의회 자체의 한계를 토로하며, 지금의 형편에서는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나름대로 강점이 있다고 항변한다.

“이곳의 총인원이 6명이에요. 이런 한정된 인원으로 피해조사나 집행 등에 간여할 수 없지요. 인원을 늘리자니 경상비가 문제고요. 그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다 의연금에서 집행될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은 각 지방자치단체 등과 연계하기 때문에 피해조사 등에 상충되는 면이 없어요. 또 그 지역 재해 예비비를 빌려 먼저 응급구호를 하고 나중에 수재의연금을 자치단체에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수재민에게 빨리 도움을 줄 수 있지요."

정부지원과 국민모금은 분리돼야

외국의 경우 민간모금은 독자적으로 집행된다. 미국의 ‘유나이티드 웨이’, 일본의 ‘공동모금회’, 독일의 ‘이제트이 기금’ 등이 민간모금의 대표적 예다. ‘유나이티드 웨이’는 각 지역 사회복지에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때 필요한 기금은 민간이 자발적으로 모아 배분한다. 정부는 모금에 대해 간여하지 않고 있으며, 성금을 낸 사람들에게 세액 공제 등의 혜택을 준다. ‘공동모금회’도 마찬가지. 물론 모금한 돈의 사용 명세는 철저하게 지역주민에게 공개된다.

독일의 ‘이제트이 기금’은 외국을 대상으로 하는 점에 차이가 있지만 기금제도의 귀감으로 손꼽힌다. 기금은 민간이 모금한 액수의 9배만큼 국가가 보태주는 식으로 조성된다. 즉 민간이 1,000만 원을 모으면 국가는 9,000만 원을 보태 1억 원의 기금을 만들어준다. 그 대신 국가는 집행에 대해 공인회계사를 붙여 철저히 감시한다. 민간이 모금한 돈을 국가 예산처럼 집행하는 우리나라와는 자못 다른 모습이다.

“우리나라의 재난구조는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의연금을 비롯해 여기저기에서 돈을 끌어다 복구비용을 대는 후진적 형태가 그것을 반증합니다. 수재 때마다 내게 되는 수재의연금은 이제 성금이 아니라 준조세와 같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재난구조는 이제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홍수보험’과 같은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해서 정부기금으로 부족한 재난 복구를 보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민간모금은 그 나름으로 취지를 살려 미국의 ‘유나이티드 웨이’처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쓰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건국대의 허만형 교수(사회복지학)는 수재의연금 문제를 풀기 위한 핵심은 재난구호 제도의 변화에 있다고 강조한다. 수재를 당해 고통받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내는 수재의연금, 그러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정부를 돕는 게 고작이다.

최영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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