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2653

술꾼 시인 호인수 신부의 사람사랑법

술꾼 시인 호인수 신부의 사람사랑법

장난기 어린 얼굴에 평상복 차림, 호인수 신부(51세)는 마치 이웃집 아저씨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로만칼라의 근엄한 모습을 상상하던 내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사제복은 1년에 한두 번밖에 입지 않는다고 하니 소문대로 매우 소탈한 분인가 보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호 신부는 할말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저 사람들과 어울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왔을 뿐인데 특별한 얘깃거리가 있겠느냐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노동자 신부, 시인 신부, 술꾼 신부, 운동권 신부, 고무신 신부, 강론을 화끈하게 잘하는 신부 등 호인수 신부를 지칭하는 많은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게 살아온 그의 내력을 이미 들은 바 있는 나로서는 이제 그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게 과제였다.

새벽밥 짓는 어머니를 위해 신학 시작

호인수 신부가 신학공부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였다. 뭔가 거창한 소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학시절 인천에서 서울의 동성중학교까지 통학하는 자신을 위해 새벽밥을 짓는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에서였다. 어린 마음에도 100% 기숙사 생활을 하는 신학교에 들어가면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도 웃음이 나온다고 한다. “어려서는 많이 순진했죠"라며 허허 웃는 그가 민중에 대해 눈을 뜬 건 77년. 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선배신부의 석방기도회중에 사제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성명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제가 작성한 것이지요. 사제품을 받은 지 채 1년도 안 된 햇병아리 신부인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여기저기 자료를 엮어 작성했죠. 그게 문제가 돼 연행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제단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임에도 그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취조를 당한다는 두려움보다는 모른다는 부끄러움이 더 컸다. 연행이 부당하다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잘못을 짚고 소신을 밝힐 논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공부를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만났다. 변형윤 선생, 리영희 교수, 신경림 선생 등은 모두 그때 만난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눈이 조금씩 떠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

80년 보좌신부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본당신부로 부임해간 곳은 인천의 한 변두리 고잔동 성당. 그야말로 시골이었다. 그때도 신자들에게 신부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며 설교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그저 어울렸을 뿐이다.

이렇듯 호 신부의 민중사랑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스스로가 민중이 되어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실천하는 생활 그 자체였다.

83년 가톨릭노동청년회 지도신부를 맡으면서 호 신부는 노동운동과도 만나게 된다. 툭하면 수배되고, 해고되는 험악한 상황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자연히 노동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부평 성당으로 부임하면서는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성당 안에는 항상 도망다니는 노동자, 학생들로 붐볐다. 경찰은 성당 주변을 매일같이 에워쌌고 그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로 신자들과의 관계도 어려움이 많았다. 유리창이 박살나기 일쑤였고 ‘호 신부 아비가 6·25 때 부역한 빨갱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신자들의 발길을 돌리려는 음모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86년 인천 5·3사태 이후에는 배후조종자로 몰려 다시 한 번 대공분실로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매일매일 전쟁 같은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옳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밥 먹고 이 정도도 안 하면 어떡합니까." 호 신부다운 대답이다.

나는 서민이다

호 신부는 술을 좋아한다. 아니 술자리를 좋아한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신자들과 어울리다 보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신이 할 일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신자들이 ‘술꾼’이라고 놀려도 상관없다. 그렇다고술에 대한 별다른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술 안 마시고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어디 제대로 할 수 있나요?" 하듯 호 신부도 같은 생각이다. 주량은 그저 ‘조금’. ‘다행히’ 별다른 술버릇은 없다. 술을 마시면서도 얘기를 많이 하진 않는다. 살아가는 얘기, 고민되는 얘기, 그런 얘기를 주로 듣는 편이다.

그는 늘 깨끗한 흰 고무신에 셔츠 차림을 즐긴다. 도저히 신부티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은 동네 아저씨. “이제 신던 고무신도 다 떨어졌어요" 하며 허허 웃는다.

이런 호 신부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한 예가 있다.

백령도 주임신부 시절 성당 뜨락에서 한마당 잔치가 벌어졌다. 술이 돌고 음식이 돌고 흥이 돌았다. 여기에 호 신부가 직접 장구를 치며 민요를 불러댔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흥은 절정에 달했고 평소 신부를 근엄하게만 보아온 신자들도 자기들과 한데 어울려 먹고 마시는 신부를 보고선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우리 신부님, 따봉!’이라며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좋아했다. 가톨릭문화운동연합의 이사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문화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호 신부에게 장구나 꽹과리를 치며 주민과, 신자들과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말 나온 김에 호 신부가 생각하는 문화운동에 대해 들어보자.

“문화예술 활동이야말로 복음을 전달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열 마디 설교보다 좋은 연극 한 편, 좋은 노래 한곡이 더 많은 감동을 주죠. 70, 80년대 명동성당 뒷마당에서 연극하고, 노래하고, 마당극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은 조금 주춤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문화운동이 새롭게 부활되어 많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호 신부가 택한 문화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시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작품을 즐겨 읽던 호 신부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적어두는 건 어느새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고. 직업시인이 아닌 만큼 시상을 위해 일부러 여행을 다니지는 않지만 여행을 할 때는 항상 ‘여행일지’를 쓸 만큼 기록을 생활화하고 있다. 이렇게 적은 ‘느낌’은 강론을 할 때도 그 빛을 발한다. 시를 인용하면 신자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 없다고.

“그렇게 자랑할 만한 건 못 돼요. 그저 그때그때 드는 생각을 적어본 것뿐인데요." 그러나 『차라리 문둥이일 것을』과 『백령도』 등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집을 두 권이나 낸 실력파. 꼭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주위의 권유로 부족한 얘기를 시집으로까지 내게 됐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계속 낼 계획이란다.

87년 발간된 첫 시집 『차라리 문둥이일 것을』은 사제품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80년대 초까지의 이야기를 모은 시집이다.

“고잔동 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외딴 곳 움막집에 온몸에 부스럼이 난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염전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가는 아주 어려운 집이었죠. 그 아이를 보며 차라리 문둥이가 되면 국가에서 치료를 해주고 요양원이라도 보낼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지은 시입니다."

두번째 시집 『백령도』는 2년 간 백령도 성당 주임신부 시절의 느낌을 적은 것으로 시 곳곳에 백령도로 대표되는 이 땅의 것을 소중히 사랑하는 호 신부의 우리 땅 사랑, 민족애가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분단의 아픔에서 생기는 모든 질곡―외세, 이데올로기의 대립, 반통일, 반민주, 군사독재문화, 경제독점 등―에서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저 틈틈이 써온 시를 엮은 것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백령도 시절, 웃고만 넘어갈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 본의 아니게 주민이 벌인 데모의 배후조종자가 된 것.

“백령도는 군사최전방 요충지로 주민보다는 군인들 위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군인이 곧 법인 곳이었죠. 신자들에게 항상 주민이 우선이고 군인들은 그 주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강조했죠. 군대 지휘관들과 갈등도 많았습니다. 걸핏하면 외출금지령을 내려 성당에도 못 오게 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인천으로 출장을 온 사이 주민이 데모를 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지나치게 어업활동을 통제하는 데 반기를 든 것이죠. 그런데 군대측에서는 우습게도 제가 사주했다고 오해하고 있더군요."

그게 백령도 최초의 데모 사건이었다고. 그 뒤 별다른 해결책 없이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그토록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어떻게 ‘항의’의 몸짓을 할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의아하다고 한다. 아무리 약하게 보여도 결코 약하지 않은 민중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물론 이런 호 신부를 탐탁지 않게 보는 눈들도 많았다. 정치신부로 몰려 어려움을 겪은 일도 있었다. 신자들과 너무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신부로서의 권위에 어긋난다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그러나 호 신부는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과 많은 사람이 응원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사제 호인수

요즘 호 신부의 최대 관심사는 교회 쇄신. 성직자가 달라지면 교회가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믿음이다.

“그동안 교회는 사람들의 삶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성역화되어왔죠. 마치 그러한 모습이 정도인 양 인식되어왔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은 ‘외도’하는 신부로 ‘찍’힐 수밖에요.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더 이상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호 신부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중사랑의 한 길을 달려온 이유를 알 수 있는 말이다.

호 신부는 그동안 교회의 개혁을 위해 많은 제언을 해왔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다고.

“가끔은 내가 신부로서 하는 일이 뭔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는 회의도 듭니다. 사제복을 벗을 수 없는 건 아마도 용기가 없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강하고 올바른 신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사제생활 만 22년의 베테랑 신부인 호 신부가 지금도 늘 고민하는 문제라고 한다. “그저 올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뭐"로 대답을 대신한다.

올바르게 살기 위해 늘 고민하는 사제, 호인수 신부가 사제복을 벗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교회개혁을 위해, 신자들과 지역주민을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는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70, 80년대를 숨가쁘게 달려온 호 신부인 만큼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도 높다.

“70, 80년대 운동은 너무 경직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군 아니면 적군이라는 논리가 지배적이었죠. 같이 어깨동무를 할 수 있었던 사람까지도 우리 스스로 배척해왔죠. 한 예를 들자면 당시엔 립스틱 하나만 발라도 비판받곤 했습니다.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좀더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좀더 많은 사람과 팔짱을 낄 수 있는 운동양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전문가들의 역량결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치권력이 바뀌고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누구를 향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런 만큼 시민운동 또한 그 방향을 찾기가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죠. 이런 때일수록 광범한 분야에서 전문가 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말하는 반민주적, 반통일적 세력 안에는 다양한 전문가가 포진되어 있지만 시민단체들은 이에 견줄 만한 실력이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다양한 전문영역을 두고 개개의 시민이 힘을 모아줄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비록 예전처럼 삶을 모두 투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시민단체들이 해야 할 몫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다양한 전문가들을 끌어안고 있는 참여연대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일한다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섰던 신부 호인수. 공단에 위치한 주안5동 성당의 ‘한길야간학교’, ‘무료진료소’, 부평1동 성당의 ‘성심중학교’, 백령도 성당의 ‘한글학교’ 등은 모두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이런 호 신부가 요즘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이 있다. 주임신부로 재직중인 간석2동 성당의 실정에 맞춰 주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 구상이 그것.

“간석2동은 가난한 노인들이 많은 동네입니다. 그런 만큼 노인들 복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준비중이에요. 아직은 뭐라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내년 봄쯤이면 가시화될 것입니다."

호 신부의 말을 듣는 동안 약속한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누고 싶은 얘기는 아직도 너무 많은데…. 그러나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호 신부는 늘 자신의 자리에서 신자들과, 지역주민과 함께 ‘사랑’을 실천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밤에도 신자들과 술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서로 마음을 여는 많은 대화가 오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성당 앞까지 배웅을 나와준 호 신부와 얘기를 하다 우연히 본 흰 고무신이 너무도 깨끗하게 느껴졌다.

정현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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