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1012

한 삼성전자 직원이 참여연대로 보낸 편지

총수님, 삼성가족 대신 기어이 자동차를 택하시겠습니까

97년 말에 밀어닥친 IMF 사태 이후 국내 다수 기업이 그렇듯이 우리 삼성전자 또한 지난 3월에 이어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과 인원 감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이번에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임직원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심리적 공황 상태로까지 이어지고 있어, 마치 회사가 파산의 길로 치닫는 듯한 안타까움에 글을 띄우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한 삼성전자의 모든 임직원에게 회사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 아닌 삶의 전부였습니다. 회사는 결국 우리 자신이었으며,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배들로부터 지금까지 무한한 자부심 속에 묵묵히 오로지 일만 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삼성의 전통이 되어왔습니다. 언젠가 전국가적으로 파업의 열풍에 휩싸일 때도 우리는 무풍지대일 수 있었던 것은 오너의 강한 의지가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스스로 노조를 통한 극단적 파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다른 기업의 종업원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금번의 대량 감원사태가 이번에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조차도 훨씬 더 큰 좌절과 배신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불과 2∼3년 전이었습니다. 반도체를 포함한 많은 사업이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구가할 당시 회사는 청사진을 그리며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고, 실제로 엄청난 이벤트의 연속이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전대미문의 복리후생제도, 업계 최고 수준의 급여, 특급호텔 수준의 화장실, 상임임원 및 부장 배낭여행, 제주신라의 호화판 세미나, 협력회사 및 대리점 사장 부부 한가족 세미나, 삼성체전, 홈커밍데이(Home comming day), 수천억 원이 투입된 본관 리노베이션 등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종업원들에게는 공수표였으며, 물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회사는 당시 “경영은 사람이 한다. 따라서 회사는 인재를 육성해야 하고 신바람을 일으켜 줘야 한다”는 거창한 논리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물량 공세를 펴며 국내 경제의 버블화를 선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상황이 변해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고사하고, 많은 동료가 내몰리고 있습니다. 물론 불과 지난 2개월여 전, 요구하지도 않았던 임직원 대토론회를 통해 9월 대량 감원설에 대해 사장께서는 단호히 부정하셨습니다. 아마도 9월이 아닌 8월이라는, 시기를 부정하셨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장께서는 임직원을 기만하였거나, 불과 2개월 후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는 최고 경영자로서 자격미달이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닌밤중에 홍두깨라고 난데없는 제값받기 운동으로 IMF가 안겨준 수출의 호기를 두 눈 뜨고 놓치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장께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임직원은 2개월여를 불안과 초조 속에 지내왔으며, 이러한 심리적 공황 상태는 마치 파산의 길을 걷고 있는 회사의 분위기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오너는 편법적인 방법으로 탈세하여 2세에게 막대한 재산을 증여했다고 매스컴의 질 좋은 안주(?)가 되어, 종업원들을 망연자실케 하셨습니다. 최소한의 인간미, 도덕성, 에티켓은 오히려 최고 경영진들에 의해 이미 실종되었습니다. 오너는 아집과 독선에 빠져 있으며 경영진은 개인의 신변안전에만 눈이 어둡고, 조금 ‘한다’ 하는 임원들은 줄대기 바쁘고, 종업원들은 한숨짓는 나날 속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경영진은 회사의 경영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고 있어 대대적으로 사업 구조조정과 인력 감원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경영진의 희생양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오너의 숙원사업인 삼성자동차의 생존을 위한 최후 수단인 기아자동차 인수에 드는 자금 조달과 기아자동차 인수에 따른 반대급부로서 빅딜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회사와 종업원들은 오너의 욕망 성취와 경영진의 이기주의의 희생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실례로 지난 7월 31일자 어느 일간지에 자동차만 할 수 있다면 가전, 항공, 에버랜드 등 전부를 내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청춘을 불사르며 몸을 바친 이 회사는 우리의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너가 원한다면 항시라도 회사를 떠나야만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오너의 아집과 경영진의 무능 속에 우리가 회사를 떠난다고 해서 회사가 정상화되지는 않습니다. 나타난 부채만 12조 원이 넘는 기아자동차 인수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 회사의 자금이 어떠한 형태로든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그룹 내에서 가장 많은 부담을 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기아자동차 인수는 곧 회사의 경영상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갈 것이며, 결국 우리의 동료들이 회사를 떠나는 것도 회사의 경영안정과는 전혀 별개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떠나면 안 됩니다. 우리의 회사는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이에 한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국내여타 기업의 종업원들이 흔히 동원하는 방법은 폭력적인 파업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우리의 생리에도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재의 국가 경제적인 상황과 국민적 여론에 비추어 자칫 회사를 더욱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사주운동으로 회사의 주인이 됩시다”

임직원 모두는 우리 사주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사주의 본래 의미는 모든 종업원으로 하여금 회사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나, 현재는 단지 오너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알 길이 없으나, 종업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주식 수는 전체 발행주의 10∼15% 수준이리라 확신합니다. 따라서 우리 사주만으로도 대주주가 될 수 있으며, 우리 스스로 회사를 지키고, 현재와 같은 부당한 감원을 제지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를 공론화하고 종업원들의 의지를 결집시켜 운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인데 모든 분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참여연대측에서 소액주주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회사의 경영진으로 하여금 진땀을 흘리게도 했습니다. 아무튼 참여연대와의 활동을 통해 우리 자신이 회사의 주인이 되고 회사를 정상화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호응을 당부드립니다.

회사측에 할 우리의 요구를 몇 가지 정리합니다.

첫째,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는 재검토돼야 합니다.

둘째, 소유와 경영은 완전 분리되어야 합니다. 과거 고도성장 시기에는 오너의 카리스마적 지배경영이 나름대로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 사실이나 현재와 같은 최악의 경영환경에서는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경영이 절실합니다. 따라서 기존과 같이 오너의 경영간섭은 중단되어야 하며 삼성전자에서 비서실(구조조정 본부)은 분리되어야 합니다.

셋째, 기아자동차의 인수참여를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현재까지 나타난 부채 규모만 12조 원에 이르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할 경우 회사 경영에 심대한 타격이 우려되는 바, 오너의 의지가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면 우리 회사는 인수에 따른 제반 사항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넷째, 대표이사를 포함한 현경영진은 전면 퇴진해야 합니다. 경영상태를 악화시킨 데 대한 책임과 최소한의 인간미, 도덕성, 에티켓을 저버린 데 대한 책임을 지고 결자해지의 자세로 전면 퇴진해야 합니다.

한 삼성전자 직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