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804

다국적기업에서 통일한국 보호할래요

환경운동연합 상근자원활동가 채드 푸트렐

"공처가?"

점심식사 자리에서 남편의 가사노동 분담에 대한 농담 섞인 논쟁(?)이 가열될 즈음 문득 채드가 던진 말이다. 그는 어디선가 가사일하는 남편을 ‘공처가’라고 들었던 모양이다. 한 활동가가 가사노동 분담과 공처가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하자 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작은 수첩을 꺼내놓고 한글로 또박또박 내용을 메모한다. 지난 9월 1일 환경운동연합에서 상근을 시작한 채드는 활동가들과의 식사시간과 술자리를 한국어 강의시간으로 활용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유별난 관심, 동양철학, 유럽문학, 인류학, 페미니즘과 탈구조주의론 등에 심취한 학구파. 된장국 한 그릇에 밥 한 공기를 국물도 없이 깨끗하게 비우는 미국인. 182㎝의 키에 79㎏의 훤칠한 체구 그리고 아직도 소년티가 남아 있는 26세의 청년. 채드에 대한 단순 묘사들이다. 하지만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시민운동에 대한 깊은 고민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불행하게도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만 관심 있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요. 그들은 국가 내지 인류의 미래가 달린 중요 사안에 대해 결정적인 통제력을 갖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시민운동이 절실한 것 같아요. 시민운동이야말로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죠. 자각되고 자발적인 시민의 힘이야말로 다음 세기의 가장 큰 희망이 아닐까요."

그는 지금의 한국사회를 보면서 10년 전에 군사독재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고 털어놓았다. 사회의 빠른 변화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의 활발한 활동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채드의 눈에 비친 한국은 아직도 이해 못할(?) 법과 제도가 존재하는 나라지만, 민주주의로의 이행속도가 아주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나름대로 분석을 한다. 그는 또 환경운동에 대해서도 뚜렷한 자기 주장을 갖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대개 환경을 무시하지요. 개발을 통한 부의 축척에 가장 큰 걸림돌이니까요. 따라서 환경운동은 기업과 정부가 꺼리거나 할 수 없는 부문에서 ‘공공선’을 복원해내는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특히 요즘 한국에 불어닥친 ‘세계화’ 바람을 의식한 듯 시민사회운동단체의 자기 혁신과 적극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아주 원칙적인 얘기지만, 지금은 시민운동단체들이 지역적·지구적 차원의 조직적 연대 내지 통합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시점 같아요. 기업들도 다국적화하면서 자꾸만 몸집을 불리잖아요. 그만큼 그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지요. 이렇게 자꾸만 거대해지는 불평등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운동도 적극적인 전략을 펼쳐야 하지 않을까요."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입장은 과격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한 인상

을 주었다. 특별한 운동 경험도 없는 그에게 이처럼 자못 진지하고 논리정연한 문제의식이 있는 이유는 뭘까.

“저는 아주 가난한 농촌 지역에서 자랐어요. 그곳 사람들의 약 65%는 미국의 최저 소득수준 이하였죠. 하지만 저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모두가 비슷한 처지였으니까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미국은 엄청난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극단적인 차이에 화가 치밀었지요. 이러한 충격은 아주 진지하고 비판적인 문제의식으로 다가왔어요."

또 다른 세계를 접하면서 엄청난 내적 변화를 겪은 채드는 돈과 명예 따위가 혐오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하며 증권중개인 자격증도 취득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유럽문학까지 욕심을 내어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탑골공원을 찾는 이유

유학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채드는 우연히 친구를 통해 한국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96년 7월 광주의 한 영어학원 강사로 자리잡으면서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느낌과 지금의 생각을 묻자 채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매우 어려운 질문이네요. 굳이 말하자면 한국의 폐쇄적인 면이 느껴졌어요. 사실 미국에서는 흑인 또는 아시아계 친구들이 결코 인종주의의 대상이 아니었지요. 물론 한국이 미국보다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다만 한국에서 인종(차별)주의는 또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요."

6개월 후 서울로 자리를 옮긴 그는 제일 먼저 시민단체들의 목록을 만들었단다. 그리고 25곳의 시민단체에 전화를 걸어 외국인 자원봉사자의 필요여부를 문의했고, 그 결과 유니세프와 환경운동연합이 답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97년 봄 유니세프에서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영문서신 정리와 일상적인 잡일이었지만 방송녹음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아시아나 항공 국제선을 이용하다 보면 유니세프 모금안내 방송을 듣게 되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채드다.

유니세프에서 10개월의 자원봉사활동을 마감한 채드는 지난 겨울 환경운동연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년여의 비상근 자원봉사활동을 거친 후 9월 1일부터 상근자원봉사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결코 짧지 않은 2년 동안의 한국생활, 그는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는 세대차이와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한국사회는 지금 농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기처럼 느껴져요. 아마 한국사회도 ‘디지털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식민지시대를 살아와 아직도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할아버지와 비디오 게임, 전자오락, 인터넷과 채팅을 즐기는 손자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에요. 이런 극단적 광경을 보고 싶다면 종로의 오락실과 탑골공원에 가보세요. 오락실과 탑골공원, 그 2분이라는 짧은 거리에서 저는 한국사회의 내면을 느낄 수 있어요."

채드는 현재 환경운동연합 상근활동가 영어교육과 국제연대 지원업무를 맡고 있다. 1년이라는 기간을 정해놓고 상근을 시작했다기에 다른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는지 물어보았다.

“모든 것은 변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계획은 1년 동안 환경련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시민운동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요. 그러고 나서 코넬 대학 환경경제학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싶은데 만일 시험에 떨어지면 잠시 쉬었다가 곧바로 ‘평화봉사단’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그렇게 되면 2∼3년 동안은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보낼 것 같아요. 그 다음에는 정말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아마 결혼을 한 후 다시 대학원에 가지 않을까."

그리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소박하지만 특별한 계획 한 가지.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배워서 북한이 붕괴되면 그곳에 들어가 뭔가를 기여하고 싶어요. 북한이 붕괴되면 그것을 이용할 수많은 탐욕스런 나라(미국, 일본, 유럽 그리고 남한의 사업가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부패한 다국적기업으로부터 통일한국을 보호할 수 있는 작은 힘이 되고 싶거든요."

김달수 월간 『함께 사는 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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