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쟁점 둘-참여민주주의

기는 국회, 뛰는 시민입법운동

한 나라의 유권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 수준을 측정하는 척도는 무엇일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제 손으로 뽑을 수 있으면 상당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봐도 좋은 것인가? 우리가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제 손으로 뽑 게 된 것은 10년도 채 안 됐고 그걸 얻기 위해 수십 년간 피나는 싸움의 세월을 보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토록 고생하며 얻어낸 결과가 주는 보람은 예상치를 훨씬 밑돌고 있는 듯하다.

선거 때만큼만 유권자가 대우받는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유권자 지위에 대해 제법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유권자는 ‘반짝 유권자’라 불러야 하리만치 철저히 선거용 개념이다. 선거철만 지나면 우리는 무권자(無權者)로 전락한 채 다음 선거를 기다려야 한다.

사실 따지고보면 그나마 선거시기에나 행사하는 ‘반짝 권리’라는 것도 실제로는 절기마다 찾아오는 약장사에게 매번 ‘만병통치약’을 사고나서 번번이 후회하면서도 또 사고야마는 시골장판의 해프닝 같은 것으로, ‘권리의 행사’라고 말하기보다는 ‘농락당함’이라고 표현해야 옳을런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네 선거관계법에 따르면 주어진 후보에게 표 찍는 행동 이외에 유권자가 선거과정에 개입해 선거판을 좌우할 수 있는 어떤 조직된 행동도 할 수 없도록 돼 있다(통합선거법 제87조).

세계 어디서나, 정치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대의제라는 정치형식의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 없겠으나 대의제의 희극에 비극적으로 농간당하는 데서는 우리 나라도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대의제에 대해 배신감을 느껴본 나라에서 일찌감치 시작된 운동 형태를 보통 ‘시민운동 혹은 신사회운동’이라고 부른다. 우리 나라에서 시민운동이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을 듯싶다.

점점 늘고 있는 시민입법청원

시민운동은 선거와 정당이 채워주지 못한 “갖가지 요구를 ‘일상적’으로 실현하고 관철하기 위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제기하는 이슈나 이념에서 천차만별이지만 대의제에 대한 비판과 시민참여의 보장을 주장함에 있어서는 대체로 한목소리를 내곤 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경직되고 오만한 정당정치와 대의제”가 담아낼 수 없었던 갖가지 권리개념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도정치권에 문제제기하면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한편 그 다양한 방식의 문제제기들 속에서 법적 대안의 제기로까지 나아간 문제제기, 예컨대 시민입법운동 양식은 이런 류의 운동에서 상당히 진전된 양식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시민운동이 대안적 주체로까지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사회 시민입법운동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 시민사회운동은 96년 두 개의 대비되는 통계치를 얻게 됐다. 하나는 속상한 통계이고, 하나는 희망을 보여주는 통계이다. 속상한 통계부터 말하면 14대 국회 4년기간 동안 시민이나 시민단체가 시민입법 형태로 청원한 150건 내외의 제, 개정 법률안 중 단 한 건도 정식 안건으로 검토된 예가 없다는 것이다. 이 통계치는 우리네 선량들이 얼마나 고압적인 존재며 이들에게 유권자가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들이 늘쌍 지역구의 경조사에 쫓아다닌다한들 의정활동과정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독선과 오만을 감출 수는 없다.

게다가 선량들의 알량한 권위 밑에 감추어진 무능과 무소신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4대 국회기간 동안 처리한 902개 법안 중 651건(64.4%)이 정부발의안이며 의원발의로 통과된 321건 역시 상당수가 정부안을 ‘패스’받은 여당안이 통과된 것이다. 사실상 거수기 노릇만 한 셈이다.

한편 15대 국회 개원 이후 11월 28일까지 국회청원과에 접수된 시민입법청원은 14대 국회 같은 기간의 1.5배에 해당하는 45건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시민입법운동의 성장은 건수의 증가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입법운동이 주로 법 제정보다 개정청원에 치우쳤고 특정 이슈를 부각시키기 위한 정치적·도구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면, 최근의 입법안들은 완결적인 제정안으로 청원되는 경우가 잦으며 개정안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대안적 검토와 추진세력 확보에 기반해 제출되고 있다.

또한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이하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한국유권자운동연합 등은 의정감시단, 입법감시단, 의정평가단 등 상설적인 국회입법활동 감시기구를 발족하고 1대1 개인정보파일 작성, 상임위 모니터링, 시민정치참여를 위한 제도개선 입법활동 등 종합적인 대응을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과거 유권자 운동의 수준이 공명선거감시운동 등 제한적인 선거감시활동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본격적인 일상적 유권자운동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시민입법운동 혹은 시민의정감시운동이 의도한 성과를 충분히 거두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아직까지 시민입법운동 상의 몇 가지 맹점이 드러나고 있다. 우선 대다수의 법률안이 전문가에만 의존하고 있어 입법청원 전후 유권자의 조직화나 참여구조 확보에 대체로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둘째, 입법감시단-의정평가단 등 모니터링 체계구축을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선언적인 차원에 머물 뿐 모니터 방법론이나 자원봉사 메뉴얼 등이 구비되지 않아 실질적인 모니터링으로까지 나아가고 있지 못한 점도 개선돼야 할 점이다. 셋째, 선거법 상의 제약(사회단체 정치참여금지 등), 시민입법안에 대한 성실한 심의를 강제할 제도적 장치의 미비, 국회방청권-속기록 접근 제약 등 각종 제도적 한계를 뛰어넘을 강력한 프로그램의 부재도 반드시 지적돼야 할 한계이다.

부패방지법 제정운동 경험

시민입법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해 시급한 것은 물론 제도개혁이다. 그러나 제도적 장벽을 뛰어넘을 창조적 방안의 모색 또한 절실하다. 현재의 ‘법률안’ 마련 중심의 입법운동으로는 제도권에 대한 정책판매형 활동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대안적 주체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보완적 주체로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96년 한 해 동안 참여연대 맑은사회만들기본부에서 추진한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은 유권자 운동으로서의 시민입법운동에 하나의 중요한 전형을 세워냈다고 평가할 만하다.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은 몇 단계의 면밀한 입법운동 전략에 의해 추진됐다.

우선 부패방지법을 성안해 공청회를 연 후 세부 주제별 워크숍을 연중 지속적으로 개최해 정책적 기반 및 인적 기반을 차분히 쌓아나갔다.

두 번째 단계로 총선 전후 ‘부패방지법 제정을 위한 정치인 대유권자 약속운동’을 전개해 총선 전후의 국회의원(혹은 후보)들로 하여금 가장 유권자의 힘이 필요할 때 법안에 서명토록 압력을 행사했다. 일종의 유권자운동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 방식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지난 11월 7일 의원 과반수(151명)의 동의로 부패방지법안을 입법청원할 수 있었다. 크로스 보팅(Cross Voting :당론에 반대해서 표결에 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 정치현실에서 과반수 서명이 강제력을 가진 약속은 아니었지만 과반수의 상징성으로 인해 정치권 전체를 충분히 긴장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세 번째 단계로 여론의 압력을 적절히 활용했다. 『한겨레신문』 등과의 기사제휴로 부패추방에 대한 기사를 연중 게재하는 한편, 매주 1회의 가두서명과 단체연대서명을 통해 시민서명을 함께 추진함으로써 무시 못할 여론의 힘을 조직할 수 있었다. 입법청원 전후 준비된 사회원로 100인의 반부패종합대책 촉구 성명도 당시 정치권에서 진행되던 논의에 대해 시민과 여론의 개입의지를 명확히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요컨대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의 사례는 열악한 제도적 여건 속에서 시민입법운동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 셈이다.

지난 해 6월 서울시 환경정책평가토론회에서 경실련의 한 간부는 민간단체도 조례안을 발의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을 해서 주목을 끌었다. 이미 발전된 시민사회를 가진 나라들에서는 정당정치와 대의제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민단체나 지역시민모임에 발의권이나 표결권을 행사토록 하는 제도를 광범위하게 도입하고 있다.

민간단체에 조례안 발의권을

그러나 지난 정기국회 회기 동안 국회상임위 모니터링을 선언한 몇몇 시민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은 국회의장의 구두지시를 받았다는 수위들에 의해 상임위 회의장 앞에서 쫓겨나는 게 현실이다. 우리가 원하는 권리와 우리가 실제 누리는 권리는 이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또한 그 간극 만큼이나 시민입법운동을 비롯한 참여민주주의 운동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올해에는 대선이 있다. 또다시 ‘선생님’ 정치, 청탁(請託)정치, 원망(願望)정치의 바람이 지역의 이름으로 휘몰아칠 것이다. 올해 시민운동은 대리통치가 아니라 참여민주주의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최소한의 모범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이태호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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