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5년 07-08월 2005-06-08   1525

“월급 ¼로 줄었지만 마음은 4배로 커졌습니다”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공성경 간사

월급 ¼로 줄었지만 마음은 4배로 커졌다

월급이 반의 반 토막이 나도 그다지 불행해졌다고 느끼지 않는 이도 있다.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간사 공성경(34)씨가 그렇다.

공씨는 지난해 6월 3년 동안 다니던 아메리칸 은행의 경기도 평택 미군부대 지점을 그만두고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높은 보수와 근무환경 등 때문에 취업 준비생들에게 단연 인기라는 외국계 기업을 두말없이 등진 것이다. 그의 월급봉투는 과거와 견줘 두께가 4분의 1 정도로 얇아졌다.

아메리칸은행 미군지점 3년 근무, 효순·미선양 사건, 이라크 침공에 문제의식 없는 그들 보며 절망감

‘안락’ 포기하고 시민운동의 길로 “시민운동 참여문화 뿌리내렸으면” 당시 결혼 생활 4년째이던 그는 전직을 앞두고 아내(31)한테 “내가 시민운동을 하게 되면 맞벌이에 나서야 한다”며 고민할 시간을 1주일 줬다. 아내는 “뜻이 정 그렇다면 …”이라며 남편의 선택을 수용했고,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팍팍한 살림을 조금이나마 벌충하고 있다. 공씨는 그 때 아버지를 찾아가서는 “앞으로 용돈 드리기 힘들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집안에 괴짜 하나 났다”는 말을 들었다.

공씨 부부는 이제 웬만하면 신용카드 안 쓰기와 여간하면 사교모임 안 나가기를 실천하며 제법 풍족했던 고액연봉자 시절의 기억을 잊어가고 있다.

학생 때 ‘운동권’ 근처에는 가보지 않았다는 그가 어느 날 조건 좋은 직장을 버리는 ‘비상식’적인 일을 감행한 것은 직장에서 경험한 ‘몰상식’과도 관련이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효순·미선양 사망사건 때 그의 주변에 있던 미국인들은 업무상과실치사일 뿐이라는 반응만을 보였고, 이듬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는 그들한테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감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2002년 평택역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여해 “‘이런 데 한 번 나오면 그게 다인가?’라는 자문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5월 참여연대 간사 모집 공고를 보고는 평화군축 활동에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에 변신을 결행했다.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을 물색할 때부터 시민단체 활동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서도, “하지만 애가 딸렸으면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 와중에 예상치 못한 문제도 생겼다. “10년 넘게 후원금을 보낸 복지단체가 있는데, 긴축을 하다 보니까 할 수 없이 후원을 끊게 된 게 마음아프다”는 것이다.

공씨는 전에도 ‘상식 파괴’적인 일을 벌인 적이 있다. 의장대에서 군 복무를 하던 1995년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애국지사 유해를 이장하는 행사에 나갔다가 거슬리는 광경을 봤는데, 몇몇 군인들이 코앞의 군 골프장에서 시끄럽게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골프가 나쁘지는 않지만, 엄숙한 분위기를 해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 그는 사병 신분으로 ‘감히’ 국방장관한테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얼마 뒤 국방부에서 온 답장 겉봉투를 본 부대장은 “무슨 사고 쳤느냐”며 화들짝 놀랐지만, 마침내 골프장을 가리는 울타리용 나무가 심어졌다.

적은 월급 속에서도 보람을 찾는 공씨는 요즘 고민이 하나 있다고 했다. 회원 확보와 그들에 대한 서비스가 주 업무인데, 참여 열기가 조금씩 식어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공씨는 “많은 단체가 시민 참여 저조로 어려움을 겪는다”며 “꼭 우리 단체가 아니어도, 시민단체 하나씩은 회원으로 가입해 지지하는 문화가 뿌리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2005일 6월 7일 한겨레신문에 실렸습니다.

한겨레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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