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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07월
  • 1995.07.01
  • 505
부패는 ‘식국’이며 ‘식인’이다
잇닿는 떼죽음의 참상에 분노하고 비찬하던 사람들은, 이제 ‘사고의 세계화’, ‘참사의 세계화’를 자조하며 찬 웃음을 날린다. 찬 웃음을 씹는다. 비아냥거림의 찬 웃음은 절망과 체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참으로 오늘, 이 땅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다리만이 아니다. 백화점만도 아니다. 생명의 존귀함, 인간의 인간다움이 무너지고 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다는 칸트의 도덕률로 예외일 수는 없다. 그 가운데서 인간의 인간다운 희망도 무너지고 있다.

민망하지만, 나는 ‘총체적 부실’이라는 절규 속에서 오히려 ‘총체적 부패’의 악취를 ‘제구실’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다. 역시 가장 나쁜 악덕은 “그 자신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갈파했던 괴테는 정당하다.

우리는 흔히 부패라면, 검은 돈의 수작만을 떠올린다. 물론 그르지 않은 연상이다. 검은 돈의 수작이 얽히지 않은 부패란 거의 없다. 그러나 보다 넓고 보다 원천적인 뜻에서의 부패란, 그의 직무규범과 공공의 복리를 배반하는 작태다.

일본말을 즐겨 받아쓰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이 땅에서도, 희한한 현상은 확인된다. 오직(汚職) 또는 독직(瀆職)이라는 표현은 좀처럼 회자되지 않는다. 그의 직책 또는 직무를 더럽히고 욕되게 한다는 오직과 독직은 아무래도 광범한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는 탓일까. 뇌물을 죽고 받는다는 어려운 표현의 낱말들만이 횡행한다.

그러나 보라. 참담한 삼풍백화점의 붕괴에서도, 우리는 총체적으로 쌓여온 직무규범의 저버림과 공공복리의 배반을 확인한다. 서로가 허물을 떠미는 건설회사들은 제자리에 있었는가. 준공검사 이전의 가사용과 거듭되는 설계변경을 승인한 공직자는 정작 제자리에 있었는가. ‘살인검사’라는 독설이 퍼부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멋대로 건물의 용도를 바꾸고 시설물을 옮겼던 백화점의 회장, 사장들은 또 어떠했던가. 여기 저기서 붕괴의 경보가 확실한 현상으로 울려오고 있는데도 그대로 손님들을 맞아들였던 그들은 제자리에 있었던가. 그들은 물리적으로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들만이 몸을 피한 채 무고한 떼죽음을 부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직의 칼날은 무디기만 하다. 관대하기만 하다. ‘미필적 고의’라는 전제가 붙는 ‘살인’의 소추마저 외면하는 추세다. 진정 이 땅의 사직은 마땅한 제자리에서 있는 것인가. 입법권도 비슷하다. 5년 이하의 징역, 200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현행법의 제약에 뒤늦게야 놀라는 기색이다. 이제서야 중벌주의의 입법론을 들먹인다. 한마디로 입법의 태만이다. 그렇다면 역시 제자리에 서 있었던 것인가.

그 모두가 직무규범과 공공복리를 저버리는 총체적 부패의 증상이다. 검은 돈의 수작이전에 확연히 드러나는 부패의 기상도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거의 그 총체적 부패의 기류에 민감하지 못하다. 생선장사가 비린내에 둔감하듯이, 부패의 악취를 제대로 맡지 못하는 현상이야말로 어쩌면 만연된 부패의 반증일 지도 모른다.

불현듯 고인이 된 한 스승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분은 왜곡으로 젖어버린 이 땅의 언론을 개탄하면서, 언론종사자들의 ‘연탄가스 중독’ 증상을 꼬집었다. 그대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는가. 따라서 정의의 감각이 마비되어버렸는가. 언론을 휩쓰는 왜곡의 기류를 감지하지도 못하게 되었는가. 그것이 그분의 질타였던 것이다.

그분이 살았다면 이제 ‘부패가스 중독’의 엄연한 증상이다. 부패의 만연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정신의 병균이다.

비단 그 사람만이 아니다. 오늘에도 부패를 부패로 직시하고, 부패를 부패로 직언하는 사람마저 드물다. 한때 떠돌았던 ‘부조리’라는 사뭇 철학적인 용어로 부패를 호도하기 일쑤다. 정작 그들은 부패의 응보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인가. 부패의 연구들을 훑어보면, 전율할 수밖에 없는 부패의 표현, 부패의 낱말을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낱말이 태국의 ‘킨 무온’이다. 부패를 가리키는 태국말의 ‘킨 무온’은 ‘식국(食國)’이라는 뜻이다. ‘나라를 삼킨다’는 뜻이다. 그렇다. 부패는 나라를 삼킨다! 그 실증의 하나가 월남의 패망이다. 전사자의 보상금마저 가로채먹는 월남의 부패는 마침내 나라를 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때문에 월남의 패망을 ‘부패의 응보’라고 풀이하는 견해도 설 자리를 갖게 된다. 역시 ‘킨 무온’의 태국말은 과장이 아닌 정곡의 낱말이다.

나는 오늘 태국말을 익히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 ‘식인(食人)’이라는 말을 알았던들, 부패는 ‘식국’일 뿐 아니라 ‘식인’이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도 있을 터이니까 말이다. ‘식국’이 ‘살국(殺國)이듯이, ‘식인’은 ‘살인’이다. 그 처절한 살경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다. 대구와 서울의 가스폭발 참사다. 부패는 생명을 삼킨다! 부패는 사람을 삼킨다!

그렇다면 마땅히 부패 극복의 처방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아지 처방을 늘어놓을 만한 계제가 아니다. 우선 증상의 실감이 가난한 탓이다. 증상의 실감이 가난한 마당에, 어찌 처방이 풍요로울 수 있는가. 따라서 나는, 오늘의 처방은 부패의 실감임을 말하고자 한다.

다리와 백화점은 왜 무너지는가. 제자리에 서 있지 않은 탓이다. 왜 다리와 백화점은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가. 사회의 각 기능이, 이 땅의 사람들이 제자리에 서 있지 않은 탓이다. 기능과 사람들이 제자리에 서서 제구실을 다해야만, 다리와 백화점도 제자리에 서서 제구실을 다하게 된다.

나는 평범한 진리의 체감에서부터 부패 극복의 처방이 열려야 한다고 믿는다. 계몽과 각성과 운동과 제도도 그 바탕에서부터 우러나야 한다. 부패사범의 공개 총살형마저 서슴지 않았던 남의 나라 선례들은, 부패와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 전쟁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 붕괴의 비극은 우리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
김중배(언론인이며, 참여연대 공동대표 겸 본지 발행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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